일본의 한 음악애호가가 자신의 버릇을 시간으로 쟀다.
LP레코드를 꺼내 음악을 듣기까지 걸리는 시간이었다. 디스크 재킷을 집어, 레코드판을 꺼내 훑어보고,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먼지를 닦고, 바늘을 걸기까지 평균 29초가 걸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얼마 전 LP를 들어볼 일이 생겼다. 존 레논이 1970년대 말 미국 정부와 갈등을 빚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존 레논 컨피덴셜'을 본 후 비틀즈의 음악을 LP로 듣게 된 것이다.
이날 참 오랜만에 레코드의 먼지를 닦고, 바늘을 걸어보았다. 10년도 넘은 것 같다. CD도 모자라 이제 노래 2만 곡을 내장하는 60기가짜리 MP3플레이어를 들고 다니며 편하게 음악을 듣는 것에 익숙해 있던 터라 바늘을 거는 손이 무척 떨렸다. 그러면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마치 가재를 잡기 위해 돌을 뒤집던 어린 시절의 그 느낌이 손끝에 전해졌다. CD나 MP3플레이어의 버튼을 수도 없이 눌렀지만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음악애호가가 주장하고픈 '29초의 신비'가 바로 이것 아닐까. 그 29초는 음악을 듣기 위한 제의(祭儀)였고, 그것 또한 음악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면서 편함의 극을 치닫고 있다. 음악CD 사러갈 일 없이 돈 주고 음악을 다운받을 수 있고, 이제 영화도 집에서 합법적으로 다운받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불법 다운로드의 틀을 벗고, 집집마다 개봉관이 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편하면 편할수록 아날로그 시대의 그 신비감은 더 멀어지는 것 같다. 어두컴컴한 객석에 앉아 영화사 로고가 나올 때의 그 긴장감, LP레코드의 찌직거리는 불협화음, 음반가게에 들러 주머니 속 돈에 맞춰 음반을 선택할 때 그 짜릿함은 자꾸 먼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어느 설문에 따르면 직장인 절반이 '속도 중독증'에 빠져 있다고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기 위해, 또 느리면 능력이 없어 보일 것 같아서 저마다 속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시간은 더 부족하고, 마음의 여유도 사라지고 만다.
자연주의자 스콧과 헬렌 니어링 부부는 '자발적 가난'을 몸소 실천하며 편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 지 잘 보여주었다. 산의 돌을 주워 집을 만들고, 돌을 들어낸 곳에는 곡식을 키우며 철저하게 자연 속에 살았다. 은둔과 노동, 절제와 겸손 속에서 '슬로우 라이프'의 참맛을 즐겼다.
또 한 해의 시작을 맞았다. 폭주기관차처럼 달려가는 세월의 머리채를 잡아 끌 수도 없는 일. 올해는 '29초'의 즐거움이라도 만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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