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가를 이루다]옷수선·리폼 달인 김명광씨

대백프라자 5층 피에르가르뎅 매장 안쪽에 보면 '정장 김명광 수선실'이라는 조그마한 간판이 붙어있다. 유리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색실이 벽면 가득 채워져 있고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린다. 안쪽에서 바지를 손질하던 사람이 반갑게 인사한다. 바로 옷 수선과 리폼의 달인으로 불리는 김명광(49)씨다.

군위 의흥이 고향인 김씨는 원래 화가가 꿈이었다. 그림 그리는 소질이 남달라 각종 경시대회에서 상을 여러차례 받았지만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아 그림 공부는 그림의 떡이었다. '기술을 배워야 밥을 먹고 산다'는 어른들의 말에 따라 1979년 대구에 올라와 고향 선배에게서 양복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공장에 다니는 친구들이 한달에 월급 1만5천원을 받을 때 저는 용돈 명목으로 한달에 2천원 받았습니다. 선배가 1년간 기술 배우면 친구들 보다 훨씬 좋아진다고 했는데 사실이었습니다. 1년동안 양복 바지 만드는 법을 배운 뒤 취직해서 번 월급이 친구들보다 3배쯤 많았습니다. 친구를 만나면 통닭을 사고, 영화 티켓을 끊는 것은 모두 돈 잘버는 저의 몫이었습니다."

김씨는 서울 부산 등 전국을 다니며 양복 바지 만드는 법을 두루 익혔다. 그러다 82년 울산에서 양복 기술의 총아라 할 수 있는 상의 만드는 법을 몇년에 걸쳐 배웠다. 86년 대구로 올라와 남문시장 안에서 옷 수선 작업을 하던 그는 90년 대구백화점 수선실에 들어가면서 백화점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수선실에는 백화점 입점 매장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18명 있었습니다. 대구백화점은 수선실만 제공하고 월급은 입점 매장에서 받았습니다. 대구백화점과 동아백화점에 옷 수선하는 사람들이 모두 45명 있었습니다. 이들의 모임인 대동회 회장도 역임했죠." 김씨는 대구백화점 수선실장을 거쳐 93년 대백프라자가 오픈하면서 자리를 옮겼다. 대백프라자가 지역 백화점 가운데 처음으로 수선실을 개인에게 아웃소싱하면서 17명이 경쟁을 벌여 김씨가 수선실 운영권을 따낸 것이다. 백화점 측에서 김씨의 실력과 경력을 인정한 셈이다.

김씨는 93년부터 96년까지 최고 호황기를 누렸다. 고용한 직원 4명과 함께 하루종일 일을 해도 일감이 줄기는 커녕 밀리기만 할 정도로 사람들이 옷을 많이 구입했다. "낮에 부지런히 일을 해도 저녁이 되면 길이를 손봐야 할 정장 바지가 각 매장마다 1m 이상 쌓여 있었습니다. 하도 많아서 수선실 안에 들이지도 못할 정도였죠. 할 수 없어 파트타임으로 사람 4명을 더 고용해 일을 했습니다. 밥 먹으러 나갈 시간도 없어서 도시락을 먹으며 새벽 4시까지 옷 수선을 한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1997년 IMF를 맞으면서 사태는 급반전됐다. 경기가 급속히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일감이 해마다 전년도에 비해 절반씩 줄어갔다. 10년 이상 매출 하락세가 계속 되면서 종업원도 2명으로 줄었다. "요즘은 적자 상태입니다. 직원 인건비도 감당하기 벅찰 정도입니다. 한창 잘 나갈때는 외부 일감 쳐다 보지도 않았고 쳐다 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소문을 듣고 옷 수선을 맡기러 오는 사람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대백프라자에서만 15년 이상 일을 하다 보니 단골 손님이 참 많다. 대구는 물론이고 경북과 경남에서도 옷을 수선하러 찾아온다. 30여년간 옷을 만지다 보니 수선하러 가져온 옷 상태만 봐도 오른손잡이인지 왼손잡이인지, 그 사람의 걸음걸이는 어떤지 등을 알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속된 표현으로 웬만한 것은 눈 감고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바지 길이 수선은 2분이면 충분하다. 옷을 완전히 해체한 뒤 새롭게 재단, 봉합하는 리폼부터 한물간 옷을 유행에 맞게 고치는 일까지 모두 한다. 3시간 정도면 정장을 리폼할 수 있다.

평생을 옷 수선에 매달려 왔지만 김씨는 그림 그리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한때 화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한 적도 있었다. 81년 양복점에서 일 할 때 틈틈이 그린 그의 그림을 보고 양복점 사장 친구의 소개로 고령에 있는 도자기 회사에서 그림과 도자기 공부를 했다. "도자기 회사가 망하지 않았다면 아마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림에 대한 향수는 가슴 한 구석에 늘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배워 동호회 회원들과 전시를 열기도 했습니다." 비록 그림 그리는 일이 업이 되진 않았지만 평생의 취미로 삼은 셈이다.

타고난 손재주를 옷 수선으로 승화시킨 김씨는 주변사람으로부터 투자를 할테니 양복점을 차려서 운영해보라는 제의를 여러번 받았지만 혼자 일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어울려 일하는 것이 좋고 남의 도움을 받아 가게를 열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이름으로 리폼 전문 가게를 열 꿈은 버리지 않았다. 그는 "저보고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들이 참 많습니다. 그 분들이 만족해 하는 모습은 곧 저의 보람입니다. 당분간은 대백프라자 안에서 일을 할 계획입니다. 내년 봄이면 수선실을 5층에서 7층으로 옮길 것 같아 대백프라자 안에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내 이름 석자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시기가 오면 가게를 열 것입니다"고 말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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