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백두를 가다] 고려 왕실의 앞마당, 안동

▲ 영호루에서 본 낙동강과 안동시. 영호루에는 공민왕의 국권 회복의 의지와 노력이 담겨 있고, 안동인에 대한 사랑은 현판 글씨로 오늘에까지 내려오고 있다.
▲ 영호루에서 본 낙동강과 안동시. 영호루에는 공민왕의 국권 회복의 의지와 노력이 담겨 있고, 안동인에 대한 사랑은 현판 글씨로 오늘에까지 내려오고 있다.
▲ 선안동 김씨 종손인 김석교옹이 거처하는 방엔 고려중기를 대표하는 무인인 김방경 장군의 영존이 걸려있다.
▲ 선안동 김씨 종손인 김석교옹이 거처하는 방엔 고려중기를 대표하는 무인인 김방경 장군의 영존이 걸려있다.

천년의 땅 안동의 두 번째 스토리는 '고려'다. 안동하면 퇴계가 떠오르고, 바로 유교문화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안동의 역사·문화는 '조선'이 상당을 차지하지만 안동에 담긴 고려의 역사·문화는 조선에 비견될만 했다.

오늘의 안동은 고려가 화려하게 열었다. 고려 안동에는 세 명의 왕이 머물렀다. 그냥 머문 게 아니었다. 태조 왕건은 '안동인의 힘'이 개국의 바탕이었다. 25대 충렬왕은 안동에 30일간 머물며 안동을 임시수도로 정했고, 공민왕은 무너져가는 국운을 일으키기 위해 안동인과 절치부심했다. 안동이 70일간의 임시수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안동인들은 안동을 '고려왕실의 앞마당', '고려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한 땅' 이라고 했다.

고려의 시작을 알린 '태사묘'에서 고려 여행을 시작했다. 태사묘는 고려 건국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권행, 김선평, 장길 등 삼태사를 모신 곳이다. 어쩌랴. 안동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태사묘는 빌딩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데다 주변은 자동차가 에워싸 고려 개국의 영광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삼태사가 남긴 외형의 자산은 적었지만 안동 땅에 남긴 가치는 지금 안동의 큰 주춧돌이었다.

견훤의 후백제와 왕건의 고려는 안동(지금의 안동댐 부근)에서 한판 격돌(고창전투)을 벌였다. 당시 호족이었던 삼태사는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쳤고, 이 전투로 인해 왕건은 결국 백제를 복속시켜 고려를 열었다. 당시 왕건을 도운 호족이 수천에 달하는데, 왕건은 유독 삼태사에 가장 큰 고마움을 느꼈다고 한다.

대구 공산전투(팔공산)에서 견훤에게 대패해 겨우 안동에 다다른 왕건은 삼태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삼태사는 신라를 침공해 왕실을 유린한 견훤의 부도덕성보다는 대의명분을 가진 왕건을 돕기로 결정했다.

또 왕건은 왕권 강화를 위해 호족의 자식을 인질로 삼으면서까지 호족을 견제했지만 삼태사는 중앙에 진출하지 않고 안동에 칩거했다. 실제 고려 건국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삼태사는 누구보다도 건국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권력의 길을 택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삼태사의 행동은 왕건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왕건은 직접 당시 고창 땅에 '안동'이라는 지명을 내렸고, 도호부에 이어 오늘의 직할시에 해당하는 대도호부로 승격되게 한 것이다.

권두현 안동축제관광조직위원회 사무처장은 "고창전투 승리보다 안동이 얻은 가치는 고려 건국이후 지분을 요구하지 않은 삼태사의 처신이다. 삼태사는 물러나 큰 영예를 안았고, 그 영예를 안동에 돌렸다"며 "삼태사는 안동의 큰 스승이요, 안동 선비정신의 원형"이라고 평가했다.

삼태사를 느낀 일행은 풍산읍 소산리 마을로 가 선안동 김씨 종손인 김석교(77)옹을 만났다. 충렬공 김방경 장군의 28대 종손이다. 김옹이 거처하는 삼소재 사랑채 마루 왼쪽 벽에는 중시조 김방경 장군의 존영이 걸려 있다.

장군은 고려 중기 역사의 중심에 선 안동인이다. 장군이 산 시대는 한마디로 수난의 시대였다. 무인들의 국정장악, 몽고족의 거듭된 침입, 삼별초의 난, 원나라의 강요에 의한 두 차례 일본정벌 등은 장군의 삶과 함께했다. 장군이 안동인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재상에까지 이른 벼슬이 결코 아니었다. 백성과 고려 왕실을 수호하기 위해 몽고와의 강화를 선택했고, 고려 왕실의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 측근정치를 비판하다 고초를 겪기도 했다. 장군은 일본정벌, 삼별초의 난 평정 등 늘 현실을 따랐지만 언제나 나라의 독자성과 백성의 삶을 돕겠다는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지금의 선비정신으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당시 충렬왕은 자신의 시호를 장군의 호로 내렸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일본 정벌 당시 충렬왕이 전황을 살피는 임시 수도를 안동에 정한 것도 안동인 김방경 장군의 충절때문이었다. 삼태사의 정신은 김방경 장군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고려 안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는 바로 공민왕이다. 공민왕은 고려의 실질적 마지막 왕이다. 공민왕 사후 고려는 급격히 쇠퇴해 결국 조선이라는 나라에 그 자리를 내놓게 된다.

일행은 공민왕의 흔적을 쫓으면서 늘 궁금증이 따라다녔다. 공민왕은 10만 병력의 홍건적에 밀려 수도 개경을 버리고 그 추운 겨울에 몽진을 거듭, 안동에 70일 수도를 정했다. 왜 그랬을까? 안동이 고려왕실의 앞마당때문이 아닐까. 당시 안동은 고려 왕실과 고려 개국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공민왕 때 진출한 신진사대부의 출신지가 대부분 안동이어서 왕권 수호지로 안동을 택한 것 같다. 여기에 안동 '터'값도 한 몫 한 것 같다. 안동은 문수지맥과 보현지맥에 둘러싸여 있고, 낙동강이라는 큰 강이 흘려 당시 기마병이 주류였던 홍건적의 침임을 막아내기 위한 천혜의 요새였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동인과 고려왕실과의 오랜 친분이 공민왕이 안동으로 오게된 계기가 아니었을까. 아마 고향 집의 안온함이 바로 안동이 아니었겠는가.

안동인은 공민왕을 환대했다. 오죽했으면 놋다리를 만들어 공민왕 일행을 반겼겠는가. 공민왕은 안동에선 안동인이었다. 그리고 안동인과 호흡하며 국권회복을 노렸다. 일행은 안동시내가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낙동강변 영호루에 올랐다. 조용히 눈을 감고 영호루의 공민왕을 떠올렸다. 영호루에서 낙동강을 보며 직접 군사훈련을 했고, 장군들과 개경 회복을 논의했다. 국권 상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배를 띄워 가슴 속 슬픔을 낙동강물로 씻어 내기도 했다. 공민왕의 안동 사랑은 영호루의 현판글씨, 안동시청 현관에 걸려 있는 안동웅부 현판 글씨 등으로 남겨졌고, 공민왕의 다섯왕자 태도 안동 땅인 서후면 태장리에 남겼다.

안동의 사작은 고려였고, '고려 안동'은 훗날 '조선 안동'의 큰 틀이었다. 이제 안동 땅을 밟으면 곳곳에 숨쉬고 있는 고려 안동에 흠뻑 빠져봐야 하지 않을까.

이종규기자 안동·엄재진기자 사진 정재호

자문단 김휘동 안동시장 권두현 안동축제관광조직위원회 사무처장 박점석 안동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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