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옛 시조 들여다보기] 매화 作 '梅花詞'

매화 옛 등걸에 춘절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즉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매화가 필동말동한 계절이다. 이 시조는 조선 영조(1724~76) 때 황해도 곡산 기생 매화가 남긴 '매화사'(梅花詞)이다. 당대의 기생들이 다 그랬듯이 매화 또한 절세의 미녀였으며 재주가 비상했고 특히 시조에 능했다.

이 시조에는 곡산 원님 홍시유(洪時裕)와 매화의 애틋한 사연이 숨어있다. 매화는 재색을 겸비했지만 정절 또한 소중히 여겼다. 그런 매화가 칠십 노령의 황해도 관찰사 어윤겸(魚允謙)이 곡산에 들른 날 밤, 열일곱 나이로 잠자리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러나 어윤겸은 매화의 정절 관념에 감탄하고 늙음을 한탄하며 물러나게 했다. 그렇지만 매화는 어윤겸의 인품에 마음이 기울어 수청을 자청했고, 그의 소실이 되어 해주 감영에서 살게 되었다. 매화가 감사의 소실로 지내던 어느 날 곡산의 노모가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병이 깊어 열흘을 넘기기 어렵겠다'는 내용이었다. 급히 집에 도착해 보니 노모는 멀쩡했다. 사연인 즉, 새 원님으로 홍시유가 부임해 소문으로 듣던 매화를 찾다가 고심끝에 매화의 노모를 회유, 거짓 편지를 보내게 했던 것이다.

매화는 어윤겸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지만 젊은 홍시유의 사랑을 뿌리치지 못했다. 홍시유와 꿈 같은 보름을 지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감영으로 돌아왔지만 홍시유 생각뿐이었다. 매화는 일부러 병이 난 척하고 미친 척까지 했다. 어윤겸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고향으로 보냈다.

매화는 다시 곡산에서 홍시유의 품에 안겼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난 후 홍시유에게 감영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른바 병신옥사(丙申獄事). 홍시유는 참형을 당하고, 그의 정실부인도 목을 맸다.

매화는 홍시유 내외의 장례 후, 인생의 허무와 애타는 심사를 매화사로 읊고, 홍시유의 무덤 곁에서 목숨을 끊었다. 이후 매화를 '재가열녀'(再嫁烈女)라 부르기도 했는데, 글쎄! 자신이 지은 시조의 종장 구절처럼 '열녀가 될동말동'이 아닐지….

문무학(시조시인·전 대구문인협회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