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동일의 대학과 책]'비살생 정치학: 세계 평화를 위한 신정치이론'

글렌 D. 페이지 지음, 정윤재 옮김(백산서당, 2007)

모처럼 내린 비로 연초록 들판에 생기가 가득합니다. 살포시 고개 내민 새싹들이 우후죽순처럼 불쑥불쑥 자라고, 질퍽한 봄꽃의 향연을 마친 나뭇가지는 각종 과실들을 조롱조롱 매달았습니다. 꽃이 이른 매실, 살구, 복숭아, 자두는 제법 제 모양새를 갖추었고, 뒤늦게 개화한 사과와 배 열매는 아직 초록 이슬입니다. 때를 알고 순서를 아는 녀석들입니다. 한창 꽃이 피어날 때는 앞다투어 경쟁을 하더니만 열매를 맺는 것에는 절도가 있습니다. 여름 과일은 여름 과일대로, 가을 과일은 가을 과일대로 제 시기를 아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참으로 한심한 것이 사람들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도 이 간단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순리에 따르면 모두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텐데도 제 처지만 고집합니다. 봄에 씨를 뿌려 싹이 돋아나면 맨 먼저 해야 할 것이 흙으로 북돋우고 거름을 주는 것입니다. 잡초를 뽑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역사 이래 지금까지 인류는 '평화'를 위한 전쟁을 계속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평화는 여전히 평화를 위한 전쟁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평화'를 가꾸기보다 '평화를 해치는 악'을 제거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물과 거름을 주어 농작물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잡초를 제거하면 농작물이 저절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늘 전쟁이 중심이 된 것입니다.

지금 인류가 자가당착에 빠진 것은 이 때문입니다. 집에 있는 방어용 권총이 가족을 죽이고, 경호원이 그들 자신의 국가 원수를 살해하고, 군대가 그들 자신의 국민을 범하고 가난에 찌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핵무기가 자꾸 늘어나 그것을 발명한 사람과 소유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살생을 통해 '악'을 제거하면 '평화'가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순리를 잊어버리고 '방어의 병리'에 의해 고통받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정윤재 교수가 번역한 글렌 D. 페이지의 '비살생 정치학: 세계 평화를 위한 신정치이론'(백산서당, 2007)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책은 지금까지 선, 혹은 악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한 수많은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상처 주위에 생긴 고름을 건강 회복의 자연적 치료법이라고 하면서 살생을 정당화시킨 기존의 현실주의 정치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사회가 폭력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비살생 독립선언(A Nonkilling Declaration of Independence from Violence)을 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저자 글렌 D. 페이지 교수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정치학자로서 폭력과 전쟁의 참혹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지식인입니다. 그는 책을 통해 '비살생 사회는 가능하다'는 대전제 하에 기존의 학문적 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앞으로 실천해야 할 구체적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살생 사회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저자의 주장을 눈여겨볼 만합니다. 첫째, 다수의 인간은 살생을 하지 않는다. 둘째, 인류의 정신적 유산에 비살생의 잠재력이 강하게 내재되어 있다. 셋째, 여러 가지 학문적 성과가 인간의 비살생 능력을 증명하고 있다. 넷째, 이미 비살생 원칙에 기반을 둔 다양한 사회적 기관이 존재하고 있다. 다섯째, 비폭력적 대중 투쟁이 살생에 의존한 혁명 운동의 대안임을 보여주고 있다. 여섯째, 비살생의 경험과 뿌리는 세계 곳곳의 역사적 전통에서 발견된다. 일곱째, 비살생의 정치를 구현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가담하고 있다.

노동일(경북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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