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놀라게 한 요상한 동물들/박희정 지음/푸른 숲 펴냄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1392∼1863년) 역사를 시간 순서대로 엮은 책이다. 1413년(태종 13년) 태조실록이 처음 편찬됐고, 1865년(고종 2년) 철종실록이 마지막으로 편찬됐으며 1만707권, 1만187책으로 되어 있다.(한 책에 2권이 있는 경우도 있어서 권과 책의 수가 다르다.)
실록은 왕의 일거수일투족과 사회·문화·경제에 대해 다방면으로 기록하고 있다. 왕과 신하를 중심으로 기록한 만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지간한 인물이 아니면 실록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이름을 올린 동물들이 있었다. 코길이(코끼리), 원숭이, 낙타, 양, 물소….
조선 태종 때 일본 사신이 코길이를 선물로 바쳤다. 코에 기다란 살덩이를 매단 괴상한 동물이 도성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도망치거나 벌벌 떨며 그 앞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기도 했다. 어떤 꼿꼿한 시골 선비는 '감히 어디서 괴이한 짐승이 도성에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하느냐'며 한달음에 상경, 코길이 앞에서 큰소리로 호통치고 침을 뱉고 훈계하다가 밟혀 죽었다.
왕은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코길이를 궁중의 말과 가마를 관리하는 사복시에서 기르라고 명령했다. 코길이는 풀과 곡식, 열매, 콩을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먹어댔다. 특히 좋아하는 콩을 하루에 네댓 말씩 먹어치웠다. 게다가 자주 사고를 쳐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코길이가 국가에 도움은커녕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일이 잦자 신하들은 사형을 주장했다. 그러나 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세종은 코길이를 사형에 처하는 대신 귀양보냈다. 코길이는 목장이 있는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 얼마 살지 못했으리란 추측이 있을 뿐 유배생활에 관한 기록은 없다.
한편 이 책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코길이를 선물로 보낸 것은 '고려대장경'을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 코길이 덕분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은 일본에 여러 차례 인쇄된 대장경을 보내주었다.
성종 때는 일본이 바친 원숭이를 두고 왕과 신하들 사이에 실랑이가 있었다. 왕은 원숭이를 귀여워했는데, 남쪽 나라에 살던 원숭이가 조선에서 추운 겨울을 지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흙집을 지어주고 옷을 입혀주라고 했다. 좌부승지 손비장(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을 편찬한 조선 전기의 문신)이 아뢰었다.
"전하, 잔나비에게 입힐 옷 한 벌이면 한 사람의 백성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사옵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구멍이 숭숭 뚫린 베옷 한 벌로 이 엄동설한을 견뎌야 하옵니다. 심지어 옷이라도 한번 빨라치면 갈아입을 옷이 없어 마를 때까지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한다고 들었사옵니다. 변방을 지키는 군사들 또한…."
이렇게 시작된 실랑이는 왕과 신하, 신하와 신하들 사이에서 입씨름으로 번졌다. 성종 임금이 다소 짜증난 얼굴로 "옷을 해 입혀라"고 다시 말했지만 손비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라는 왕의 명령은 결국 철회됐다. 조선 시대에는 왕이라고 모두 자기 마음대로 일할 수 없었음을 '원숭이 옷' 사건에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대신 성종은 이렇게 명령했다.
"여봐라, 앞으로는 그 어느 나라에서 잔나비를 바친다고 해도 받지 말라. 말 못하는 짐승이 추운 나라에 와서 얼마나 고생이 많겠느냐. 얼어 죽게 만들 거면 애초에 받지 않는 것이 마땅할 터이다."
숙종은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사람들이 보았다는 낙타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하도 그 짐승이 보고 싶어 남몰래 명령을 내려 낙타를 구해오도록 했다. 낙타를 본 숙종은 "머리는 말처럼 생겼는데, 눈은 양처럼 순해보이고, 귀는 쥐처럼 작고 뾰족한데, 몸은 또 구불구불 굽이치는 용 같구나. 이토록 기이하게 생긴 짐승의 이름이 대체 무엇인고?"라며 관심을 보였다.
임금의 관심에 걱정이 앞섰던 승정원(조선시대 왕의 비서 역할을 한 기관)은 '이상한 짐승을 궁궐 안에 길러서는 안 된다'는 글을 올렸고 임금은 "궁금증을 풀었으니 즉시 내보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조선에 왔던 희한한 동물 5마리를 통해 당시의 외교와 임금의 관심, 백성들의 놀람 등을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을 섞어 이야기하고 있다. 세종은 물소를 수입해 농사를 지으려 했으나 물소가 우리 땅에 살기 적합하지 않아 아쉬워했다. 세종이 농사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성종은 원숭이를 귀여워했으니 신하들의 반대로 옷을 입혀주지는 못했다. 조선이 왕조 국가임에도 신권이 강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또 선비들이 물건을 수집하거나 애완동물을 기르는 취미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조선의 시대적 가치관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조선에는 양을 기르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다. 세종은 현대의학으로 '당뇨병'에 속하는 소갈증을 앓았는데, 어의가 양과 누런 암꿩, 흰 수탉을 먹어야 한다고 했지만 세종은 먹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기르지 않은 짐승인데다 양 기르기의 수고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이 책은 세계가 인정한 우리나라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예찬서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한 유일한 책이다. 더불어 '정확하고 정직한 기술'로도 이름나 있다.
사관은 사초를 써야 하기에 언제나 왕 옆에 따라다녔는데 왕들은 이를 때때로 귀찮게 여겼다. 조선 태종은 노루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진 일이 있었다. 그는 이 일이 망신스러워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훗날 '태종실록'에는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고 한 당부까지 실려 있다. 조선시대 왕들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와 관련된 사초를 볼 수 없도록 규정돼 있었다. 159쪽, 9천8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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