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순재의 여담女談] 나이를 먹는 즐거움

사실 늙어간다는 것은 불편하고 아주 싫다. 눈은 침침해지고 모양은 후줄근해지며 뭘 입어도 빛이 안 난다. 늙어가는 친구의 모습을 보는 것은 고약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겉은 낡아가지만 속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 참으로 오묘하다. 나이가 들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작은 것에도 눈길을 보낼 줄 아는 새로운 마음이 일기 시작하는 것이다. 몸의 낡음을 너끈히 덮을 만큼 강한 충만함이다. 늙어가는 즐거움이다.

얼마 전 한 행사장에서의 일이다. 자신의 나이가 진갑이라고 소개한 의사는 곧 기도 모임을 만들 것이라고 했다. 병으로 꺼져가는 어린 생명을 위하여 자신들의 수명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게 해달라는 기도 모임이란다. '이제 이만큼 살았으니 삶의 길이도 남을 위해 나누고 싶다'는 전석복지재단 이사장의 말에 행사장은 갑자기 환해졌다. 모두가 행복해했다. 나이가 주는 통찰력과 깊이가 가져다준 진한 감동이다. 참으로 눈부신 나이듦이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성숙함의 다른 말이다. 꽃을 보면서 문득 아름답다는 생각 외에 나무의 수고로움과 기다림의 시간이 보인다면 당신은 익어가고 있는 중이다. 세상의 중심이 나에게서 타자로 옮겨가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이해할 줄 아는 삶을 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힘찬 종소리다. 매혹적인 노년의 성숙함이다.

두루뭉술해지는 자신을 보는 것도 나이먹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나를 부당하게 대접해도 예전처럼 억울하거나 원망스럽지 않다. 그저 '알면 고맙고 아니면 그만 '이다. 그뿐이다. 나이가 주는 여유와 지혜다. 웬만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참으로 늙음은 여문 삶을 살게 한다.

몸이 사그라드는 것도 때론 기쁨이다. 눈이 침침해져 작은 것에는 마음조차 두질 않고 보아야 할 큰 것만 보는 자신이 대견하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도 가끔은 고맙다. '필요 없는 작은 말은 듣지 말고 필요한 큰 말만 들으라'는 하늘의 주문에 충실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이 깜빡깜빡하는 것도 좋다. 살아 온 세월을 다 기억하지 않고 좋은 기억과 아름다운 추억만 기억할 수 있으므로.

세상이 시끄럽다. 제대로 늙어가지 못한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베풀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넉넉한 마음으로 나이들고 싶다. 늙어가는 모양이다. sj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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