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9 매일 보훈대상' 시상식 18일 개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매일신문사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 대구보훈청, 대구상공회의소가 공동 후원하는 '2009 매일보훈대상' 시상식이 18일 오후 3시 대구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상이군경·유족·미망인·장한 아내·특별 무공수훈 등 5개 부문에 걸쳐 대구경북 각 5명씩 모두 10명이 수상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나라를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선열들의 행적이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는 이때, 이들 수상자의 삶은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게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상이군경 부문 오구수(76·달서구 송현동)씨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오씨는 의성 공업중학교에 재학중이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보병 5사단에 배속된 오씨는 1951년 10월 3일 총탄이 복부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고 육군 제1병원으로 후송돼 7개월 동안 병상에 있다가 명예 전역했다. 이후 상업은행에 입사해 20년간 근무한 뒤 퇴직한 오씨는 2000년부터 대한민국상이군경회 달서구지회장을 맡아 전국 유일의 달서구 상이군경 경로당을 운영하면서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친 회원들의 복지 향상에 앞장서왔다.

◆유족 부문 남일선(47·여·달성군 화원읍)씨

1962년 안동에서 태어난 남씨는 6·25전쟁 때 입대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새로운 인생을 위해 개가하는 바람에 3세 때부터 고모와 삼촌집을 전전하며 고달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보훈청의 도움으로 고교 서무과에 일자리를 잡으면서 장밋빛 인생을 꿈꿨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결혼 후 9년 만에 남편을 불의의 교통사고로 잃은 것. 이후 사회봉사로 새 인생을 살기로 한 남씨는 동네 마을회관 점심봉사, 소년·소녀가장, 홀몸노인 밑반찬 봉사, 각종 복지시설 후원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미망인 부문 박순년(71·북구 검단동)씨

열아홉의 나이에 6남매의 장남에게 시집간 박씨의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들이 첫돌을 지날 무렵 입대한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것. 아들과 어린 넷째 시동생을 쌍둥이처럼 돌보며 18년 동안 농사일과 가족 뒷바라지에 힘쓴 박씨는 시동생과 시누이들을 모두 결혼까지 시켰다. 박씨는 "5남매가 모두 장성한 뒤에는 남은 삶을 자원봉사자로 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6·25 미망인회원들에게 유익한 봉사를 하기 위해 대구보훈병원 호스피스 교육과정을 수료하는 등 국가유공자의 아내로서 긍지를 가지고 6·25 미망인 회원들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아왔다.

◆장한 아내 부문 김차연(74·달성군 옥포면)씨

1955년 21세 꽃다운 나이였던 김씨는 6·25전쟁 때 입은 총상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 곽수씨를 만났다. 거동이 불편한 곽씨였지만 효성 지극한 그의 성품에 이끌려 결혼을 결심했다. 당연히 결혼생활은 힘들었다. 몸이 불편한 남편 대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 여섯 식구를 위해 온갖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김씨의 헌신적인 내조 덕분에 곽씨는 장애를 딛고 상이군경회 달성군지회 지회장을 역임하는 등 모범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다.

◆특별 무공수훈 부문 장상발(77·서구 내당4동)씨

장씨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 1기로 자원입대해 낙동강 전투 등 경북일원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50년 12월 30일 신령전투에서 로켓포로 북한군 전차 3대를 파괴한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했다. 휴전 후 장교로 임관한 장씨는 1206건설공병단에서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 복구에 주력한 뒤 1966년 육군 대위로 명예 전역했다. 장씨는 이후 건축기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해 건설업체와 인연을 맺고 대구경북 건축기사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역 건설업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상이군경 부문 김광순(76·군위군 소보면)씨

군복무 중 입은 부상으로 1954년 명예 전역한 김씨는 근면과 성실로 신체적 역경을 딛고 5남매를 모두 사회의 훌륭한 역군으로 성장시켰다. 또 보훈회관을 자주 방문해 회원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삶의 의지를 북돋워주는 등 솔선수범했다. 지역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김씨는 어려운 환경에 처한 주위 이웃들을 살피고 위로하며 작은 것 하나라도 함께 나누는 등 사랑 나눔 운동을 펼쳐왔다.

◆유족 부문 황병규(77·경주시 황남동)씨

황씨는 6·25전쟁의 와중에 입대해 골절상을 입고 명예 전역했다. 이후 황씨는 1981년 현역 복무중이던 큰아들 재련씨까지 잃었다. 하지만 황씨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23년 동안 국토녹화사업에 봉사하며 푸른 국토가꾸기에 앞장섰으며, 산사태와 태풍 피해지역 복구 등에 힘썼다. 또 전몰군경유족회 경주시지회장과 전몰군경유족회 경북대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보훈단체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왔다.

◆미망인 부문 박옥란(78·포항시 학잠동)씨

박씨는 1953년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남편을 잃었다. 당시 22세의 젊은 나이에 전쟁 미망인이 됐다. 이후 박씨의 인생은 자갈밭이었다. 두살이 된 아이와 임신 5개월의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계란 및 수예품 행상으로 끼니를 연명했다. 숱한 역경과 시련을 견딘 박씨는 음식점을 경영하면서 일어설 수 있었다. 이후 음식점 사업은 번창했고 박씨는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았다. 불우미망인들을 음식점에 정기적으로 초청했고, 해마다 연말엔 지역 불우노인들을 초청해 경로잔치도 열었다. 이런 선행 덕에 박씨는 많은 기관단체들로부터 표창과 감사장을 받았다.

◆장한 아내 부문 조성남(60·칠곡군 석적면)씨

베트남전쟁에서 얻은 부상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남편 이병훈(전상 5급)씨.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건 동네의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남편의 따뜻한 마음씨였다. 시부모님과 시동생까지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짐도 묵묵히 짊어졌다. 어린 자식을 업고 산을 오르내리며 땔감을 구했고, 손발이 터지는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가족들을 보듬었다. 형편이 나아지자 조씨는 소외된 이웃들로 시선을 돌렸다. 남편과 함께 지역 보훈 대상자들의 복리증진과 권익 신장을 위해 함께 뛰었다. 고단한 세월을 이겨낸 조씨는 봉사와 희생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

◆특별 무공수훈 부문 김옥명(76·영양군 영양읍)씨

1950년 11월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육군에 입대한 김씨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장을 누빈 공로로 1953년 6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54년 4월 제대 후 공직생활을 하며 지역발전을 위해 땀을 흘렸다. 1994년 6·25참전유공자회 영양군지회장으로 부임한 후 2001년 무공수훈자 전공비 건립을 위해 사재를 털었고, 2003년 영양군 보훈회관 건립에 힘을 쏟았다. 2004년에는 6·25참전유공자기념탑 건립추진위원으로 활동했다. 15년간 국가유공자를 위해 한결같이 봉사한 공로로 2000년과 2005년, 2006년 3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장 표창을 수상했다.

정욱진기자 pencho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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