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구술(口述) 아카이브

얼마 전 한국 추상화 분야의 원로 작가이던 극재(克哉) 정점식(鄭点植) 선생이 타계하셨다. 향년 92세. 망백(望百)의 연세에 천수를 다하셨다고는 하나 비보를 접한 필자는 우선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어야 했다. 5년 전 극재 선생의 구술을 통해 귀중한 역사적 자료인 한국근현대미술사를 채록(採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정보관에서 현존하는 문화예술계의 원로들을 선정하여 역사적 자료를 구축하는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했었다. 이 프로젝트의 조형예술 분야에 제1차 채록연구 대상자로 대구에서는 유일하게 극재 선생이 선정됐고, 필자에게도 채록연구 스태프로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구술 아카이브란 일반적인 아카이브보다 더 구체적인 자료로 원로 예술인들의 생생한 영상과 육성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예술적 체험과 작품세계를 집중 기록하는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문학이나 미술, 음악· 연극· 무용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 걸친 사업으로 근현대예술사 연구를 위한 단초로 활용하기 위해 정책 차원에서 시행되었다. 구술 아카이브는 구술 대상자와 채록 연구자, 녹취 및 녹취문 작성자, 영상촬영 팀으로 구성돼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특히 영상자료는 구술 대상자의 생전 모습과 육성을 동시에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그런 의미에서 무엇보다 우리나라 구상계열의 강세 지역인 대구에서 추상화 분야의 초석이 된 극재 선생이 선택됐고, 구술을 통해 한국근현대미술사를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게 됐던 것이다.

그 당시 매주 한 차례 극재 선생의 자택을 방문해 하루 2시간씩 5주 간에 걸쳐 진행된 채록 연구자와의 인터뷰에서 필자가 맡은 일은 인터뷰 내용을 일일이 녹취하고 그 내용을 윤문없이 순수한 녹취문으로 작성한 뒤 선생의 일대기에 맞도록 각주·교정·교열·편집하는 일이었다. 시간으로 따져 10시간 동안 채록된 내용을 문장으로 정리한다는 것 또한 여간 고된 작업이 아니었다. 자그마치 단행본 한 권 분량(A4용지 150여쪽). 그 프로젝트가 완성되기까지 6개월 간 비지땀을 흘리며 문서화 작업에 매달렸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렇게 어렵사리 구술 아카이브로 역사적 자료를 남기신 분은 현재 대구에서 극재 선생이 유일하지만 현존하는 지역 원로 예술가들에게도 동시대의 귀중한 자료를 후세에 전하는 제도적 뒷받침이 마련돼야 할 것 같다. 격동의 한 세기를 외길로 걸어오며 자신만의 혼(魂)이 담긴 독특한 분야를 개척해온 원로 예술가들의 생애와 예술사적 체험을 영상물로 채록·보존하는 일은 어느 한 개인이 추진하기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애 수성아트피아 전시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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