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절대평가

'선비, 그 이상과 실천'전은 서울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이 다음달 말까지 여는 전시회이다. 올해 경북민속문화의 해를 기념해 경북도와 마련한 특별전으로, 경북 지역 21개 문중에서 출품한 20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안동 권씨 충재 종택이 내놓은 충재 권벌의 영의정 추증 교지, 조선 4대 명필의 한 명이었던 김구와 이황 허목 등의 친필, 학봉 김성일의 유서통(관찰사 절도사 등이 부임할 때 임금이 내리는 명령서인 유서를 넣어 다니던 통), 우복 정경세의 호패 등이 그것이다. 박물관 측이 의성 김씨 학봉 종택에 출품을 부탁하러 간 날이 공교롭게도 불천위 제사일이어서 때맞춰 받아올 수 있었다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제사 용구 일체도 있다.

그 중에 눈길을 끄는 유물이 퇴계 이황의 향시 답안지이다. 가로 2m73㎝, 세로 75㎝의 꽤 큰 종이에 퇴계가 정성 들여 쓴 글이 가득 담겨 있다. 27세 때인 1527년 안동에서 치러진 것으로 추정되는 향시 소과 답안지다. 인재 양성 방안과 경서 해석 문제가 출제됐는데 퇴계는 인재 양성 답으로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은 드물므로 장단점을 살펴서 장점을 북돋우는 방법을 써야 한다고 작성했다.

퇴계는 이 시험에 합격했고 이어 34세 때 대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그런데 답안지에 붉은 한자로 크게 매겨진 점수는 인재 양성 二下, 경서 해석 三上이다. 一二三에 上中下 9등급이었다고 보면 6등급과 7등급에 해당하는,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점수다.

향시는 성균관 입학 또는 대과 응시 자격을 주는 시험이었고, 절대평가로 성적이 매겨진 게 낮은 점수의 가장 큰 이유다. 앞으로 더 학문에 정진하라고 점수를 짜게 주었다는 것인데, 현존하는 향시 답지들 중에는 二上도 아주 드물다고 한다.

대과 점수는 어땠을까? 모든 과목에서 요즘으로 치면 A학점 격인 通(통)을 받았지만 주역에서는 낙제점인 不通(불통) 바로 위로, 요즘의 C'D학점인 粗(조)를 받았다. 20년 동안 퇴계를 연구한 정석태 박사는 그래서 "50세 이전의 퇴계는 미완성의 인물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 산하 교육과정특별위원회에 이어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가 상대평가인 고교 내신을 절대평가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동방의 공자로 우뚝 선 퇴계의 초년 시험 성적과 당시의 입시 시스템을 보면 일리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상훈 북부지역본부장 azzza@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