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은 오셨어?" "아직…" "에이, 만날 그놈의 연극, 연극!" 배경은 어느 병원 응급실. 위독한 어머니가 생사의 기로에 섰는데도 큰아들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중년의 동생과 제수는 초조하고 야속하기만 하다. 그놈의 연극이 뭐라고.
8일 오후 9시쯤 남구 대명동의 한국연극배우협회 대구지회 연습실. 후텁지근한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극 배우들이 막바지 공연 준비에 한창이었다. 17~19일 대구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리는 고(故) 이필동(2008년 8월 작고·향년 64세) 선생 추모 1주년 연극 '선택'의 연습장이다.
'선택'은 대구 연극인들이 오랜만에 의기투합한 작품이다. 이필동 선생이 대표로 있었던 극단 원각사를 중심으로 대구무대, 연인무대, 처용, 마카 등 5개 극단 20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김현규, 채치민, 홍문종, 박영수 등 원로급 배우와 성석배, 장효진, 허세정 등 중견 배우, 이중옥, 안건우 등 젊은 배우들이 한무대에 선다. 전 대구연극협회장 박현순씨가 연습실을 내놨고, 여러 소극장들이 홍보를 돕고 있다.
"한 사람의 얘기라기보다 전체 연극인들의 얘기라고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주인공 '이연극'역의 채치민씨는 "연극하는 사람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배우들은 옛날 일화를 하나둘 꺼냈다. 1970, 80년대다. 세트 제작비가 없어 광목천으로 무대를 만들어 놓고 공연한 날, 이필동 선생은 관객 앞에 무릎 꿇고 사죄했다고 한다. '불값'(조명비용)을 받지 못한 업자가 조명실을 잠가놓고 사라지는 바람에 전 배우들이 돈을 구하러 뛰어다니기도 했다. 연습장이 없어 '오바'를 입고 공사장에서 연습을 했고, 학교 운동장에 물주전자로 선을 그어놓고 운동장 라이트 불빛을 조명 삼아 연습한 일도 있었다. 거짓말 같은 진짜 이야기다. 홍문종 씨는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며 낮게 웃었다. 그는 70년 이필동씨가 만든 극단 '공간'에 연구단원으로 가입, 이씨와 인연을 맺었다. 김현규씨는 "그 어머니가 참 자애로운 분이셨다. 부러진 안경을 실로 매고 바느질로 아들 형제들을 키웠다"며 이필동 선생의 어머니를 추억했다.
연극 '선택'은 연극에 평생을 바친 한 연극인의 이야기다. 극중 '수전노'라는 연극을 준비 중인 주인공 '이연극'이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연극 공연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위독한 어머니의 병실에 늦은 이야기나, 공연 당일 새벽 장지에서 허겁지겁 돌아와 얼굴에 분칠을 하고 무대에 선 얘기는 모두 이필동 선생의 실화다.
이남기 연출자는 "배우들 각자가 일정이 바빠 자정 넘게까지 연습하는 일이 많았다"며 "'추모'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전개를 무겁게 끌고 가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원각사 김미향 대표는 "선생님은 늘 '어쨌든 막은 올라간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다"며 "연극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표상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고 추억했다. 공연 시간은 17일 오후 7시 30분, 18, 19일 오후 6시. 문의 053)624-0088.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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