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송재학의 시와 함께] 사막 편지 2

이규리

사막은 남성성을 지녔다 잊을 만하면 돌아와 앞섶을 여는 회오리, 사막이 우는 날은 내가 한없이 유순해진다 비로소 그를 안을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평원의 한 곳, 모래를 파고 만든 내 방에 한 번 와보시라 나는 점점 단순해지고 방안엔 명호청보다 부드런 깔개만 하나 있다 어떤 울음, 혹 콜로라도 강줄기를 따라 갔던 여행자들 중 만의 하나 다시 이곳을 들르는 사람은 보겠지 내가 사막의 페니스를 물고 기꺼이 혼절하는 것을,

사막에서 재는 온도는 일생 중 가장 붉다 그건 울음의 온도이다

여기서 사막과 화자는 남성/여성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

남성/여성의 남성으로서의 사막은 '사막에서 재는 온도는 일생 중 가장 붉다 그건 울음의 온도'로 화자의 삶에 작용한다. 화자는 콜로라도 주의 건조한 사막을 보았다. 그 건조함이 무엇보다 화자에게 여성성을 불러일으키며 애처로움으로 다가왔다. 건조함은 비를 기다리는 자세이다. 아마도 사막의 선인장이나 기타 사막의 식물들을 보면서 화자는 그 식물에게 기우제의 의식을 바쳤을 것이다. 그 의식의 밑바탕에 깔린 것이 '비로소 그를 안을 수 있'던 모성성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모성성에서 다시 '나는 점점 단순해지고 방안엔 명호청보다 부드런 깔개만 하나 있'는 여성성으로의 전이에서 다시 '내가 사막의 페니스를 물고 기꺼이 혼절하는 것을, 사막에서 재는 온도는 일생 중 가장 붉다 그건 울음의 온도이다'라는 사람까지 이 짧은 시에는 세 가지 인격이 존재한다. 아마도 화자가 말하려는 것은 마지막 행의 언술이리라. 그 언술의 바탕은 사막이 가진 열정을 화자의 육체에 연결시키려는 방법론이다. 사막이 화자의 육체에 깃든다? 아마도 사막은 그때쯤이면 더욱 관념화되어 모래가 바람에 날리는 사막이 아니라, 뜨거운 사막으로 바뀔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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