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녹색지대 사람들]원로 서예가 남석 이성조씨

자연에 깃든 순수의 보금자리

대구 동구 중대동 서촌초등학교 바로 밑 '공산예원(公山藝園)'. 팔공산 파계사 가는 길의 이 집은 이미 팔공산의 상징쯤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집의 주인은 원로 서예가 남석 이성조(72). 팔공산에 집을 지은 예술인 1호다.

지금이야 팔공산, 가창, 청도 등 대구 인근에 둥지를 튼 예술인들이 많지만 1985년, 그가 이곳에 터를 닦던 때만 해도 깊은 산중에 홀로였다. 그 후 그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하나 둘 팔공산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25년 전엔 비포장 도로에다 버스도 하루 두 번밖에 다니지 않았어요. 산에서 토끼랑 사슴이 내려오고 진돗개가 너구리, 오소리를 물어오던 시절이었으니, 천지가 개벽한 셈이지."

그는 공동묘지 27구를 옮기고 터를 닦아 이 집을 지었다. 터를 사느라 돈이 없어 2년 동안 토굴을 만들어 공부하며 생활한 적도 있다. 공산예원. 이곳에서 그는 제자를 길러내고 갖가지 예술장르를 펼치고 싶었다. 유난히 집이 큼직한 이유다.

그의 집은 한옥과 양옥이 교묘하게 섞인 분위기다. 멀리서 보면 절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가에 인연이 있어서다.

"1년 남짓 출가한 적이 있어요. 사는 건 재미없고, 자살은 비겁하니까. 그 때 해인사 백련암에 성철 스님 밑에 있었지. 결혼하고 자식까지 있는 걸 들켜 쫓겨나긴 했지만."

이런 인연 때문일까. 그는 최근 금오산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남화사에 60폭짜리 대형 병풍을 희사했다. 이 작품은 화엄경에 수록된 보현보살행원품(普賢菩薩行願品). 부처의 공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보현보살의 10대 원(願)을 닦아야 함을 밝힌 것이다. 가로 27.3m, 세로 2.3m의 대형 작품이다. 이것은 20여년 전 3년 동안 만든 역작으로, 작품 가치로 따지면 수억원을 호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절대 경제사정이 넉넉해서가 아니다. 부처님에게 모든 걸 맡기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자연에 사는 즐거움이 지극하다. 아니, 예술가라면 자연 속에 살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작가는 환경에 따라 심상이 달라져. 눈 뜨면 보이는 게 산이고, 풀이니까 원래 다혈질이고 외향적인 나도 이곳으로 옮기고 난 후 마음이 안정되고 변했어요. 도심 속 시멘트 건물에서 작품이 제대로 나오겠어요?"

그래서 그는 후배들에게 초가집을 지어 살더라도 시멘트 집에서 나와 땅을 밟으며 살라고 권한다.

팔공산에서 두문불출하기 20여년. 그는 '순수 예술이 정상 평가를 받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돈으로 예술 정신을 사고 파는 현실에 넌더리가 났다. 아마 돈을 밝혔으면 진작에 재벌이 됐을 거라고 말한다. 그는 오로지 작품에만 몰두하며 홀로 있는 시간을 즐긴다.

그는 프로 서예가를 자처한다. 평생 현실과 야합한 적 없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시장'도지사'기업가 등 소위 돈과 명예를 지닌 사람들이 그를 찾아오지만 그는 늘 당당하고 꼿꼿하다. "털끝만큼도 금력'권력 앞에 아첨하는 마음이 든 적이 없어. 이게 예술가들 특권이잖아? 사실 그렇게 살기도 힘든데, 용케도 버틴 거지."

그는 "기를 빼앗기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기가 살아있어야지. 그러려면 부끄러운 짓 안 하면 돼.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남한테도 당당해지지."

그는 요즘 심근경색으로 좋아하던 술도, 담배도 끊었다. 그래도 그는 낙천적이다. "이 병이, 참 멋있는 병이에요. 언제 어느 순간 갈지 모르니까, 자식들 신세 안 지고 갈 수 있잖아요. 아침에 눈 뜨면 오늘 내가 살았구나, 감사하죠. 부처님께 모든 걸 맡기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요."

그는 요즘도 아침이면 꽃밭을 가꾸고 채소를 키운다. 닭도 몇 마리 기른다. 오랜 세월 자연과 함께해서인지 그는 목소리부터 피부까지 십년쯤은 젊어보인다.

"잘가요." 그는 장난스럽게 '브이'자를 그리며 손을 흔든다. 말간 그의 낯빛이 동자승같다.

##서예가 남석 이성조

경남 밀양이 고향으로, 18세에 처음으로 붓을 든 이래 1959년 만 20세라는 최연소 나이로 국전 서예부문에 입선했다. 이후 국전에만 13번 입선 또는 특선을 차지했다. 부산대 미술과를 졸업한 남석은 초'중'고와 대학에서 미술 교사생활을 25년쯤 했다. 1981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초대전에서 노산 이은상 선생과 함께 한국 예술계를 대표해 미국에서 서예전을 열고 1983년 보현행원품 60폭 병풍과 독립선언문 36폭 병풍을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해 이름을 떨쳤다. 1985년 혼탁한 서예계에 환멸을 느끼고 팔공산 공산예원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 서예가로 작품 활동하고 있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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