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속 예술 산책] 매그놀리아 /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화면 가득 내린 개구리비…세상의 원한 다 씻었을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린 베리 힐이란 작은 마을에서 한 선량한 약사가 강도 셋에게 피살됐다. 그런데 그 강도들의 이름이 그린, 베리, 힐이었다나.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스쿠버 다이버가 깊은 산 높은 나무에 걸려 죽은 시체로 발견됐다. 알고 보니 산불을 끄던 비행기가 호숫가의 물을 퍼 나르는데, 그 운 없는 다이버가 그 비행기 물탱크에 빨려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조종사와 다이버는 며칠 전 카지노에서 대판 싸웠던 사이라나.

또 이런 일이 있었다. 부모의 부부싸움에 넌더리가 난 소년이 옥상에서 투신했다. 추락하던 소년이 총에 맞았다. 엄마는 늘 빈 총으로 위협하며 부부싸움을 했는데, 소년은 둘 중 아무나 죽으라는 생각에 총을 장전했다.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기 집 창문을 지나는 찰나 엄마는 총을 발사했고, 그 총알이 소년의 가슴팍을 강타한 것이다.

이런 일들을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필연이라고 해야 할까. 우연과 필연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매그놀리아'(1999)는 우연 치고는 기가 막히고, 필연 치고는 어처구니없는 이런 일들을 거론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상처로 점철된 세상만사 또한 의외에서 해답이 나올 수 있다고 얘기하며, "이 사람들을 보세요!"라며 기구한 9명의 삶을 풀어낸다.

모두 TV 퀴즈쇼로 연결된 사람들이다. 거물 프로듀서 얼(제이슨 로바즈)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시한부 인생. 젊은 시절 병든 부인과 어린 아들을 버리고 젊은 아내 린다(줄리안 무어)를 얻은 죄책감이 밀려든다. 얼의 아들 잭(톰 크루즈)은 남성 우위 처세술 강사로 이름을 날리지만, 성까지 바꾸며 아버지와 관계를 끊으려고 한다. 린다 또한 바람을 피우며 재물을 탐한 과거를 뉘우치지만, 이 또한 씻을 수 없는 상처다.

퀴즈쇼 진행자 지미(필립 베이커) 또한 암 선고를 받았다. 이제 그는 아내에게 털어놓는다. 딸 클라우디아(멜로라 월터스)가 마약에 빠져 엇나가게 된 것이 자신이 몹쓸 짓을 했기 때문이라고. "이젠 기억도 안나. 내가 왜 그랬는지." 후회를 하며 딸을 찾았지만, 죽음을 앞둔 늙은이는 문전박대를 당한다.

한때의 잘못된 판단으로 가족들을 아프게 한 장본인과 그 상처로 평생을 아프게 살아온 사람들의 엇갈린 삶이 영화의 축이다. 여기에 얼의 간병인 필(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원수지간인 부자지간을 맺어주려 하고, 경찰관 짐(존 씨 라일리)이 클라우디아의 상처를 감싸면서 곁가지를 이룬다.

퀴즈쇼의 달인은 과연 삶 또한 그렇게 명쾌하게 답을 낼 수 있을까. '매그놀리아'의 배경이 퀴즈쇼라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과거의 지식은 현재의 보배"라는 퀴즈쇼의 모토는 과거 때문에 고통받는 주인공들의 삶으로서는 여간 역설적인 것이 아니다. 30년 전 지미가 배출한 퀴즈쇼의 신동 도니(윌리엄 H. 메이시)는 패배자로 전락했고, 천재 소년 스탠리(제레미 블랙맨)는 프로그램 도중에 오줌을 쌀 정도로 부담을 느낀다. 삶에는 정해진 해답이 없다는 것, 그것이 감독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 모두는 행복하지 않다. 너무나 불행해 세상과 단절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원망스럽게 하늘만 쳐다본다. 이때 에이미 만의 노래 '현명해지세요'(Wise Up)라는 곡이 흐른다. 등장 인물들이 모두 관객을 보며 한 소절씩 따라 부른다.

'당신이 처음 시작할 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죠. 이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죠. 이제 당신도 알거예요. 그것은 멈추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현명해지기 전까지는. 그것은 결코 멈추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그냥 포기해요.'

에이미 만은 1983년 결성된 뉴 웨이브 팝 밴드 '틸 투즈데이'의 리더.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가사와 원숙한 감성의 멜로디의 싱어송 라이터. '매그놀리아'에는 '나를 구해주세요'(Save me) 등 그녀의 자작 8곡이 흐른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와이즈 업'(Wise Up)을 듣고 영감을 받아 '매그놀리아'를 만들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모두 함께 노래를 끝까지 부르는 것도 특이한 케이스. 그 영감에 대한 강조점이라고 할까.

죽도록 미워한 아버지를 만난 잭. 외면하던 그가 힘들게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가쁘게 쉬고 있다. 나를 평생 괴롭혔던 장본인. 처음에는 욕을 한다. "이 망할 놈의 영감아!" 그러나 고함을 지르면 지를수록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왜일까. 급기야 그는 침대에 앉아 통곡한다. "아버지! 죽지 말아요!"

그 순간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하늘에서 수많은 개구리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것. 거리에도, 지붕위에도, 베란다에도, 수영장에도…. 죄책감과 후회로 쓰러진 린다를 싣고 가던 앰뷸런스 지붕에도, 딸에게 외면당해 자살을 시도하던 지미의 집에도, 마약 때문에 괴로워하던 클라우디아의 창문 밖에도….

감독은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잠복해 있던 상처와 사슬들을 풀어주는 계기로 개구리비를 내리게 한다. "봐! 이런 일도 있어! 사람이 이겨내지 못할 일이 어디 있어?"

에이미 만의 '와이즈 업'을 들으면 유독 머리에 맴도는 가사가 있다. '자! 이제 그러니 포기해요'(So just…give up) 내 능력 밖은 어쩔 수 없는 일. 그 포기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체념이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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