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 남편 비상금 기부 "여보, 나 잘 했지?"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남편은 생전에 부모님께는 효심 지극한 아들이었고 아이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며 아내에게는 어진 남편이었다.
근면성실했던 남편은 경제권은 나에게 다 맡겨두고 하루하루 최소한의 용돈만 타서 쓰는 한 푼의 여유도 없는 형편이었기에 비상금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가끔씩은 버려야 될 것 같은 채소 등을 사들고 들어와서는 "할머니가 딱해보여서" 또는 "저녁때가 되었는데 할머니 빨리 집에 들어가시라고 사왔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남편이 어느 날 많지도 않은 나이에 뇌출혈로 하직 인사 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다. 나는 실의에 빠져 일년 남짓 남편의 유품을 끌어안고 울며 지내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정신을 차리고 남편의 유품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그러다 남편이 떠난 지 2년이 가까워질 무렵 서재에서 무심코 책 한 권을 꺼내어 펼쳤는데 책 속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만원짜리 다섯 장이 나왔다. 남편의 비상금이었다. 순간 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돈을 마련하기 우해 얼마나 노력을 했을 것이며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까? 그 사람은 이 비상금을 어디에 쓰려고 했을까? 결코 십원짜리 하나도 헛되이 쓰는 사람이 아님을 알기에 어머님께 효도선물을 사려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뭔가를 사주려고? 아니면 아내를 기쁘게 해 줄 선물을 사려고?
가슴에 돌덩이 하나를 얹어놓은 듯 무거워 나는 그 돈을 도무지 쓸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돈을 장롱 속에 넣어 둔 채 또 일년 가까이를 보내다 과연 이 비상금을 어떻게 써야 남편이 만족해할까 생각하다 평소에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 그 돈으로 떡을 만들어 어려운 아이들이 모여 지내는 어린이집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보냈다. 그제야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여보, 나 잘했지요? 당신도 하늘에서 웃고 계시는 것 맞지요?" 나는 따로 비상금을 마련하지 않는다. 어려운 사람에게 비상금이란 사치며 그보다 더한 돈도 우선은 쓰고 봐야 할 처지에 있으니까. 대신 꼭 필요한 사항이 아니면 지출을 금하고 다음에 다급한 때를 생각해 조금이라도 여유를 만들어 둔다.
김정분(경산시 와촌면 용전1리)
♥ 헉! 아내에게 발각, 그날 즉시 통장 압수조치
나에게는 아내가 모르는 비상금이 있었다. 봉급 통장은 아내의 소유였기에 매일 얼마씩 아쉬운 소리를 해가면서 받아써야 했다. 육군 부사관으로 복무하고 있던 나에게 뜻밖에 제의가 들어왔고 나는 흔쾌히 수락을 했다. 당시 군 홍보영화인 '배달의 기수' 시나리오를 써달라는 제의였다. 짬짬이 방송작가교육원과 영화인협회에서 시행한 '영상작가 교육원'을 야학으로 수료한 것과 국방부 주관의 수필과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입상한 경력이 인정되어 그런 제의가 들어오지 않았나 생각했다.
몇 년을 과외 시간을 이용해 군 홍보영화 시나리오를 써주다 보니 본의 아니게 나의 통장으로 각본료가 입금되었다. 그 돈은 아내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채 나만의 비상금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부대창설기념 체육대회가 있는 날, 아내는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이 궁금하다고 하여 병사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 내자리에 앉았다가 나의 비밀 통장의 존재를 알고 말았다. 잠깐 내가 축구경기 심판을 하러 간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그날 즉시 통장은 압수당했고 나는 또다시 아쉬운 소리를 해야 용돈을 받을 수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의 비밀 통장이 생겨난 경위와 병사들의 사기진작 비용으로 사용된 정확한 사용 용도를 알게 된 아내는 얼마 뒤 통장을 돌려주었다. 그래서 아직 나에게는 비상금이 남아있다.
김완룡(대구 남구 대명8동)
♥책 갈피·목욕탕 천장에 쏙 '아무도 모르겠지'
1970년대 초, 봉급생활자들에게 두툼한 현금이 든 봉급 봉투는 감투나 마찬가지였다. 은행에 통장 정리만 끝나면 깡그리 아내의 몫이 되고 마는 요즘과 달리 중후했던 봉투 속에서 풍겨오던 텁텁한 돈 냄새. 볼 때마다 보석처럼 빛나보이던 현금의 유혹.
그러다 생각지도 않았던 특별 상여금이나 수당 등이 생기는 날엔 일부를 떼어내 두툼한 책갈피나 목욕탕 천장 속에 아내 몰래 감추어 놓곤 했다. 생활비를 요리조리 쪼개 놓고 한숨짓는 아내에 비해 남편은 노동의 대가를 아내에게 고스란히 상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텅텅 비어가는 지갑의 비애를 그런 짜릿한 모험과 긴장감으로 달랬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그 비상금액이 크면 얼마나 컸으랴. 언제나 술과 방탕으로 이어진 것만도 아닐진대, 때론 용돈을 쪼개 아이들 앞에 슬쩍 장난감이라도 쥐여주기도 하고, '먹고 싶었다며?'하고 겉으론 퉁명스럽게 말하며 외식이라도 할 때면 은근히 뿌듯하기도 했던 돈의 실체. 때론 숨긴 곳이 생각이 안 나서 허둥거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비상금이란 것도 한때가 아닐까. 나이가 들고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혹시라도 돈이 없어 체면을 구기지나 않을까 슬쩍 뒷주머니에 챙겨주는 아내의 마음이 고맙기도 하다.
오늘도 남모르는 어딘가에 꼬깃꼬깃 챙겨둔 비상금이 있다면 장미꽃 한 송이 묶어 감성 가득한 책 한권과 함께 슬쩍 밀어줄 때 아내의 감동 또한 몇 배의 메아리로 돌아오지 않을까.
서웅교(대구 수성구 범어4동)
♥ 속바지에서 꺼내 손자들에게 '할머니표 용돈'
어릴 적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는 몰래 등을 돌리시고는 속바지 안에 달린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주시면서 맛있는 것 사먹으라고 하고는 빙그레 웃으셨다. 그 주머니는 아무도 자세하게 구경해보지 못했던 말 그대로의 보물 비상금 주머니였다. 내가 어깨너머로 슬쩍 봤던 것은 주먹만한 크기에 알록달록한 세로줄 무늬로 끈이 길게 달린 둥근 복주머니의 모양이었다.
나는 또 호기심이 발동했다. 비상금이 차곡차곡 쌓이면 주머니가 무거워질 텐데, 묵직한 것을 매일 허리에 차고 계시면서 돈을 꺼낼 때는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항상 등을 돌리시는 게 궁금했다.
"할머니, 안 무거워요?"라고 물으면 "뭐가 있어야 무겁제?"라고 퉁명스럽게 같은 말만 반복하셨다. 언제나 요술 방망이처럼 뚝딱 하면 나오는 요술주머니 같았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방을 정리하다가 다시 알게 된 할머니의 비상금 창고는 따로 있었다. 저 깊숙한 장롱 아래 장판 밑이었다. 장판이 갈라지는 부분을 들추어 보니 종이 안에 꼬깃꼬깃 접은 구권 지폐 여러 장이 있었다.
그곳은 할머니의 작은 은행이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주머니는 비상금 통장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시골에서는 은행에 나가기가 좀처럼 쉽지 않으니 할머니 나름대로 자식들이 주는 용돈을 모아 비상금으로 만들어 손자들이 놀러오면 주려고 모으셨던, 현명한 우리 할머니셨다.
요즘엔 그런 주머니를 보긴 드물지만, 가끔 보게 되면 그때 할머니의 비상금이 생각난다.
강민정(대구 남구 봉덕3동)
♥ 그래! 남편 소액 비상금은 눈 감아주는 센스
오랜만에 케케묵은 옷들을 정리했다. '그래, 2년 정도 한 번도 안 입은 옷들은 과감히 버리자'라는 생각으로 옷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니 2년 동안 안 입고 놔둔 옷들이 많았다.
장 속에 결혼 당시 예복으로 받은 무스탕 두벌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유행이 지나 입지 않던 것이라 이번 기회에 정리하자는 생각으로 주머니 속을 살폈다. 무언가가 만져지는 것이 있어 꺼내 보니 15만원이라는 큰돈이었다. 10년 전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것이라면 옛날 돈이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새로 바뀐 만원권이 있었다. 오래전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것 같지는 않았다. 갈등을 하다가 그냥 그대로 그곳에 가만히 두기로 맘을 먹었다.
요즘도 한 번씩 옷장 속 남편의 무스탕 주머니 속에서 입고와 출고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그래, 조금의 비상금은 용서해 주자"하면서 모른 체한다. 가끔씩은 남편이 집안의 기념일에 깜짝 선물도 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유정(대구 달서구 이곡동)
#생활의 발견, 작은 감동 등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이나 모임, 행사, 자랑할 일, 주위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일이 있으시면 사진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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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실 곳=매일신문 문화체육부 살아가는 이야기 담당자 앞, 또는 weekend@msnet.co.kr
지난주 당첨자=김정용(포항시 남구 대잠동)
다음주 글감은 '동창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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