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미실의 메시지'

'화랑세기' 필사본(筆寫本)만큼 진위 논란이 뜨거운 책도 드물다. 1989년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신라시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가 맞다, 아니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시대 일본 궁내성 왕실도서관에서 베꼈다는 필사본의 탄생 과정도 드라마틱하다.

이 필사본엔 화랑의 기원, 화랑의 지도자인 풍월주의 계보 및 행적 등이 향가와 함께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여기에 나오는 남녀관계 근친혼 처첩관계 통정 사통은 현재 우리의 윤리 기준으로 보면 용납하기 힘든 것들도 적지 않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미실이란 여인이 이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반세기에 걸쳐 신라를 주무른 팜므파탈로 그려지는 것이다. 대대로 왕의 여자가 되는 집안 출신인 미실은 왕들은 물론 숱한 풍월주들과 염문을 뿌렸다.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행적이지만 남편과 정부의 구분이 애매하고 근친혼이 성행했던 당시 시대를 감안하면 그렇게 색안경을 끼고 볼 것도 아니다.

1천400년 전 인물인 미실이 이번 주에 세상을 떠났다. 드라마 '선덕여왕' 주인공인 미실이 극약을 마시고 삶을 마감한 것이다. 권모술수의 화신으로, 악역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시청자들로부터 공감과 인기를 얻었던 그동안의 역할에 걸맞은 깔끔한 퇴장이었다.

'안티 히어로'의 전형을 제시한 드라마 속 미실은 이 시대 현실 정치에도 여러 메시지를 던졌다. 자신을 돕기 위해 백제와 대치하던 병력이 달려오자 뜻밖에 미실은 회군 명령을 내린다. 화랑들의 피를 뿌리며 지켰던 신라의 국경을 자신의 손으로 무너뜨릴 수 없다며 군사들에게 전선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권력 싸움보다 나라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자결을 택한 것이다. 그토록 권력을 탐한 미실도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하며 대의를 좇았다.

미실과 덕만 공주와의 관계도 흥미롭다. 둘은 권력을 놓고 피나게 싸우지만 서로 능력을 인정하고 통치 철학과 인생의 지혜를 주고받는다. 상대방을 타산지석(他山之石) 삼아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데 활용한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도 미실에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권력보다는 국가를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을 파트너로 인정하며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나저나 미실이 사라진 '선덕여왕'을 무슨 재미로 볼지 걱정이다.

이대현 논설위원 sky@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