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종욱의 달구벌이야기](45)대구의 다방

피란 온 문인·예술인 시름 달래던 '사랑방'

1936년 화가 이인성이 아카데미극장 옆에서 미도리 다방을 열었다. 대구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개업한 다방인데, 생맥주집 '혹톨'의 2층에 있었다. 그는 일찍이 일본의 제전(帝展)과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선전(鮮展)에도 입상한 주목받던 화가였고, 남산병원 3층에 '양화연구소'를 열었다. 화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사랑방이 필요해서 따로 다방을 마련했다.

북성로와 향촌동 일대에 이름난 다방이 많이 있었다. 모나미·꽃자리·청포도·백조·백록·호수 같은 다방이었다. 그 가운데 모나미 다방은 문인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해방직후 '죽순문학회' 주관으로 이효상 시인의 출판기념회가 두 번이나 열렸던 곳이자, 공초 오상순을 비롯한 피란 문인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꽃자리 다방은 구상 시인의 시집 '초토의 시' 출판기념회가 열렸던 곳이며, 청포도 다방의 이름은 육사의 '청포도'에서 비롯되었다.

백조 다방(1935년경 일본 사람이 운영하던 '아오이 찻집')은 음악인들의 사교장이었다. '백조'라는 이름은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에 나오는 백조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이삼근이 주인이었다. 그는 지팡이'베레모'빨간 스카프로 치장하고 다니던 화제의 인물이었고, 다방 또한 상업적인 다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로서는 명물이었던 그랜드 피아노가 있어서 향토 음악인들의 사교장으로 이용되었다.

1950, 60년대를 다방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아카데미극장 골목에 아담 다방이 있었다. 6'25전쟁 피란시절인 1951년 5월 어느 날 정비석, 박인환, 양명문, 그리고 출판관계 인사들과 만화가까지 합세한 가운데 육군종군작가단이 발족한 곳이다. 또한 향토의 작가 이호우, 박훈산, 최인욱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기도 하다.

그 시절, 다방은 피란 내려온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눌러 앉아서 시름을 달래던 곳이었다. 김윤성, 김이석, 김팔봉, 마해송, 박두진, 방기환, 성기원, 양명문, 오상순, 유주현, 이덕진, 이상로, 장만영, 전숙희, 정비석, 최인욱, 최정희, 최태응, 그리고 작곡가 김동진도 대구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그들은 구석 자리에 앉아서 원고를 썼고, 몇 푼의 원고료를 받으면 밀린 외상값을 갚거나 대폿집으로 달려가 울울한 심정을 삭이기도 했었다.

1970년대에 들어 다방 풍속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풍스런 다방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젊은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고급스런 시설을 갖춘 다방이 하나둘 등장했다. 코리아백화점 자리에 있던 '커피숍 왕비'도 그 가운데 하나였는데, 김옥주(64)가 도산 직전에 있던 호 다방을 인수해 개업하였다.

그녀는 여성들을 깎듯이 대우하는 파격적인 영업전략을 폈다. 비슷한 또래의 손님들이 들어오면, 여성들에게 먼저 주문을 받고 커피도 먼저 주었으며, 여성들에게는 찻잔도 최고급품을 사용했다. 그런가 하면 종업원에게 손님이 불러도 자리에 앉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짧은 치마를 입지 못하도록 하였다.

1980, 90년대는 음악 다방의 전성기였다. 뮤직 박스와 전문 DJ가 등장했다. 레코드를 골라 음악을 들려주면서 차를 팔았다. 젊은 사람들이 음악과 이야기를 즐기며 커피를 마셨고, 연인들이 다정하게 붙어 앉아서 사랑을 꽃 피우기도 했었다. 그 시절 심지'티파니'유경'은하'맥향 같은 곳이 높은 인기를 누렸으나, 숱한 사연과 향수를 남긴 채 하나 둘 문을 닫았다.

흔히들 프랑스 문학을 이야기할 때면 카페가 등장한다. 그 가운데서도 파리의 카페 '되 마고'와 '드 플로르'가 빠지지 않는다. 1885년 문을 연 '되 마고'에서 피카소와 브라크는 입체주의를 탄생시켰고, 1890년 개업한 '드 플로르'는 사르트르, 보봐르, 알베르 까뮈가 즐겨 찾던 곳이다. 이들 카페는 지금도 선대 작가들의 숨결을 느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구에도 이인성이 처음으로 다방을 연 지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뒤이어 문을 연 이름난 다방들이 숱하게 많았고, 그 가운데는 이 땅의 문화 예술인들이 피난살이의 고단함을 달래던 쉼터가 있었다. 그때 그 시절의 빛바랜 추억과 향수가 깃들인 다방 한두 곳쯤은 온전하게 남아 있었으면, 하는 게 뜻 있는 사람들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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