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가 시작되었다. 앞쪽 연단에는 축하 꽃다발이 즐비하다. 지인의 문학상 시상식에 축하객으로 참석했다. 장소가 호텔인지라 예의상 정장 차림을 했다. 이런 자리에 초대를 받게 되면 옷차림에 꽤 신경이 쓰인다. 옷장을 열어 몇 번이고 훑어본다. 맘에 드는 옷이 없다. 옷장이 비좁도록 옷이 걸려 있건만, 한 번 만에 간택되는 옷은 드물다. 고민을 하다가 검은색 치마에 선홍색 상의를 입기로 겨우 결정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자를 쓴 멋쟁이, 미니 스커트로 한껏 멋을 부린 젊은 여성, 베레모를 쓴 원로 문인 등 제각각 개성 넘치는 차림이다. 그런데 식장이 온통 검은색 물결이다. 그 자리는 장례식이 아닌데도 말이다. 많은 사람이 검은 색의 옷차림을 하고 있다. 검은 색상이 아닌 옷을 입은 사람은 어림잡아 10%도 되지 않는다. 다른 색의 옷을 입은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여성들이다.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화사한 빨간색의 옷을 입고 앉아 있다. 내 눈길이 오래 그 할머니에게 머물렀다.
옷이 지닌 사회문화적 의미는 다층적이다. 음식 문화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닌 패션은 문화적 아이콘으로 작동한다. 푸른색의 군복이나 검은색의 교복은 근대 문화의 징표로 각인되어 있다. 이처럼 옷은 기능적 측면을 뛰어넘어 다양한 사회문화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20대 여성을 보고 기성세대는 충격을 받았다. 또 옷을 뒤집어 입고 나온 '서태지와 아이들'의 반란은 당대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검은 색은 겨울옷의 대명사다. 검은 색의 옷은 날씬하게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고, 세련미를 풍긴다고 한다. 남들이 다 입으니까 무난한 검은색을 따라 입게 된다. 한편으로는 검정이 아닌 다른 색상은 어쩐지 유행에 뒤지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튀는 색상은 타인의 시선을 끌게 되니 부담스럽기도 하다. 한 마디로 몰개성이다. 창의성과 다양성이 생명인 시대에 남과 다른 개성은 오히려 매력이 될 수 있다.
옷을 잘 입는 사람이 부럽다. 자신의 개성을 살려 독특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여성은 매력적이다. 경기가 안 좋으면 여성의 치마가 짧아지고 붉은 립스틱이 잘 팔린다고 한다. 현실이 힘들수록 우울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이번 겨울은 이런 법칙도 통하지 않는가보다. 검은 옷 속으로 자신을 숨기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니면 희망 없는 현실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껴안고 살아가는 사회적 병리현상인가. 올 겨울, 대한민국은 백의민족이 아닌 흑의민족(黑衣民族)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경 희달서여성인력개발센터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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