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막걸리 해'였다. 막걸리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어느 경제연구소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막걸리가 올해 히트 상품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막걸리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주로 서민들이 즐겨 마셨던 술이다. 맥주, 소주, 양주, 와인과 같은 술에 눌려 한때는 맥이 끊어지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막걸리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그 이름도 다양하다. 쌀막걸리, 생막걸리, 캔 막걸리, 현미 막걸리, 유기농 막걸리 등 별의별 수식어가 붙는다. 프랑스 와인 '보졸레 누보'를 패러디하여 '막걸리 누보'란 이름도 보인다. 고급 양주와 와인으로만 연상되던 호텔에서도 막걸리를 내놓고 있다고 한다. 연회장에서도 막걸리는 맥주나 소주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홀대받던 어제의 막걸리가 아니다.
막걸리 예찬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마치 대단한 건강식품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막걸리 전문 주점도 우후죽순처럼 생긴다. 왜들 이렇게 막걸리를 좋아하게 되었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문화는 살아 숨 쉬는 생물과 같다. 생물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변화한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생활방식에 아주 민감한 음식 문화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당연하다. 어쨌든 '막걸리'라는 우리의 전통 문화가 첨단의 디지털 시대에 왕성하게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다.
막걸리가 일본에서도 인기라고 한다. 이것도 한류인가. 그런데 일본에서 막걸리의 인기를 우리 문화의 우수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다. 문화 경쟁에서 이겨 강문화로서 위세를 떨친다고 보는 것은 일종의 나르시스다. 일본 청주가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다지 않은가. 막걸리 판매량이 와인을 앞섰다고 막걸리는 강문화이고 와인은 힘을 잃은 약문화로 보는 것은 단세포적이다. 자문화는 타문화와 상호작용하면서 자기를 변화시켜 나간다. 그러므로 오늘의 막걸리는 과거 전통적인 막걸리의 부활이 아니다. 품질이나 소비 방법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이를 잘 말해 주는 것이 '막걸리 누보'나 '막걸리 칵테일'이 아닌가 싶다. 와인 잔에 담긴 막걸리는 배고픈 시절, 허기를 채우던 그런 술이 아니다. 그래서 막걸리의 변신은 무죄다.
농부가 일하다가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은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 같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장터 주막에서 친구와 마시는 막걸리는 우정의 징검다리다. 파전이나 부추전이 안주로 곁들여진다면 금상첨화다. 한 잔하고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뽑는 노랫가락은 세월과 삶의 애환을 담아낸다. 거기에는 인간 냄새가 넘친다. 막걸리는 투박한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걸쭉한 농담을 섞어가며 잔을 주고받으며 들이키는 술이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시원한 소리는 깊은 산속 도랑에서 콸콸 흘러가는 물소리와 흡사하다. 막걸리는 꾸밈없는 자연의 술이고 사람의 술이었다. 막걸리 판에서는 언제나 술 자체보다 사람이 우선되었다. 막걸리 한 잔으로 세월의 시름을 마셔버리고, 막걸리 한 잔으로 아픈 기억을 지우려 했던 그때 그 시절이 어찌 그립지 않으리.
다른 것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월하거나 사용가치에서 타당성이 있는 문화는 어디에도 없다. 머잖아 막걸리는 대중에게 무덤덤하게 기억될지도 모른다. 막걸리 열풍은 대중문화의 한 속성으로서 일시적인 쏠림 현상으로 끝날 수도 있다. 우리가 오늘 막걸리에 푹 빠진 것은 그것의 사용가치보다는 상징적인 기호 가치 때문일 것이다. 경제적인 어려움, 희망을 주지 못하는 정치, 밀실 사회의 소통 부재, 지식정보사회의 비인간화 등에 대한 문화적 대응의 한 단면이 아닐까. 막걸리에 환호하는 소리가 소외되어 가는 서민 대중의 절규로 들리기도 하는 까닭을 곰곰이 되새겨 본다.
한 해가 저문다. 오랜 친구들과 둘러앉아 막걸리 잔을 주고받으며, 가슴을 활짝 열고 맺힌 말을 모두 쏟아놓고 싶다. 따뜻한 인정이 그대로라면, 술맛이 옛날과 다른들 어떠하리.
신재기 문학평론가'경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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