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설에는 일본인들이 잃어버린 '전통'이 남아 있다. 나는 대구에서 세 번이나 설을 보냈다. 그때마다 한국 설의 화려함과 중압감을 동시에 느꼈다. 옛날 일본에도 한국과 비슷한 전통과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그 전통을 잃어버렸고 지금은 편리성만을 찾는 '도시' 생활이 일상화되었다. 거기에는 끈끈한 인간관계가 주는 스트레스나 족쇄가 없어 편리한 점도 있으나, 사람 사이의 따뜻함이 없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도시적인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국 생활에 뛰어들게 된 나는 당황했고, 지금까지의 가치관도 바꾸어야 했다.
일본은 양력 1월 1일이 설날이다. 메이지 초기 서구화의 폭풍 속에 음력을 '아시아적인 뒤떨어진 것'으로 여기고 양력을 채용했다. 재정상황이 어려웠던 메이지 정부는 음력으로는 공무원의 월급으로 13개월치를 지불해야 하나, 양력으로 하면 12개월분만 지급해도 되기 때문에 갑자기 양력으로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하여튼, 지구의 자전에 따라 서구 국가들이 차례로 "A Happy New Year"을 외칠 때 서구를 모방한 일본도 자기 순서가 되면 정중하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신년 인사를 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설날에는 많은 친척들이 모여 며칠 동안 북적였다. 지금은 편의점에서 1인분짜리 명절 요리를 판매할 정도로 변했다. 12월 31일 오후에 방송되는 NHK의 국민적 가요 청백전도 시청률이 점점 떨어지고, 가족이 함께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 일도 거의 사라졌다.
일본보다 한 달 정도 늦게 한국에서는 전 국민이 설을 맞이한다. 대형 마트에서는 한복을 입은 점원들이 선물 세트를 판매하면서 화려함을 연출하고, 도심은 사람들로 붐빈다. 그러나 설 당일의 아파트나 도시는 적막감이 감돈다. 대체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저녁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사람들이 모두 고속도로에 모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향에 가기 위해 설날 대부분의 시간을 고속도로에서 보내는 것도 한국 문화인 것 같았다.
나는 한국의 전통 명절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무거운 긴장감에 복통을 앓기도 했다. '격식'이라는 이름의 전통 때문이었다. 전날부터 음식과 제사 준비를 하고 당일은 한복 위에 앞치마를 걸치고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음식을 나르는 한국 여성들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병풍 뒤에서 훔쳐보고 있다가 꾸중을 듣기도 했다. 남자들이 제사를 지낸 후 어른들이 "네 차례니까 절을 하라"고 했다. 주위의 시선 속에서 큰절을 한 후 뒤뚱거리며 일어서는 모습이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겸연쩍게 여자들만이 있는 부엌으로 가면서 제사라는 의례의 밑바탕에 깔린 유교적 남존여비(男尊女卑) 의식을 느꼈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한복을 입고 있는 내 모습도 주의의 대상이었다. 한복을 입으면 새우 등처럼 다소곳하게 자세를 낮추고 '조신한 여자'의 모습을 보여야 했던 것이다.
한국은 2차대전 이전의 일본처럼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현대화되고 선진국 진입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명절은 왜 아직 음력을 사용하고 옛 전통을 지키려는 걸까? 현대 사회에 맞지 않는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설날의 전통을 잃어버린 외국인인 내가 찾은 답은 '한 번 잃으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으니까'였다. 사람들의 생활에 맞게 변화한 것은 전통이라 할 수 없다. 물론, 시대의 흐름과 함께 바꿔야 하는 것, 또 원하지 않게 변해버리는 것도 있다. 그러나 쉽게 현대화에 휩쓸려버리면 전통 문화를 지킬 수 없다. 개인의 이익만을 좇는 일본 사회가 내팽개친 것을 한국의 '우리'(we) 공동체 사회는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려고 한다.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이 따를지 모르나 그것을 잃어버린 후의 아픔보다는 작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설을 쇤 경험으로 비로소 전통의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요코야마 유카(橫山由香)칼럼니스트'일본 도호쿠대 박사과정 연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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