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역사공부를 하면서 큰 충격 받았을 때의 하나가 이른바 합방공로작과 은사금에 대해서 알았을 때이다. 일제가 1910년 8월 22일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많은 애국지사들이 울분해 자결하거나 통곡했다고 알고 있었다. 망국(亡國)은 전적으로 일제의 침략 야욕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매국노라야 잘 알려진 이완용·송병준을 비롯한 몇명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른바 합방공로작과 은사금에 대해서 알고 난 뒤로는 망국의 원인에 대해서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바 '한일병합조약문'(韓日倂合條約文) 제5조에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勳功)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恩級)을 부여한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또 조선총독부관보 38호(1910년 10월 12일)는 그해 10월 7일 76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에게 일본 귀족과 유사한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작위를 수여했다고 전하고 있다. '훈공'은 제 나라 망국에 세운 공을 뜻한다.
76명의 합방공로작 수작자들의 출신 계급과 소속 당파를 분석해보면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왕실에서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가장 높은 후작(侯爵)에 선임된 이재완, 이재각, 이해창, 이해승 등은 모두 왕족 출신이며 윤택영은 순종비 윤씨의 친정 아버지였다. 윤택영의 형 윤덕영은 자작(子爵)이었고, 후작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 금릉위(錦陵尉)였다. 왕실의 일원이자 외척으로 국망에 군사를 일으켜 저항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의 절개는 보여주어야 하는데 거꾸로 나라 팔아먹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또 하나는 수작자 명단은 사실상 '노론 당인 명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집권 노론 소속이 다수라는 점이다. 일제의 '사이토 문서'(齋藤實文書)에 포함된 조선귀족약력과 1910년 일제 조선연구회에서 발간한 조선귀족열전 등을 종합해 분류해보면 수작자 중 소속 당파를 알 수 있는 인물은 모두 64명 정도이다. 이중 남인은 없고 북인 2명, 소론 6명이고 나머지 56명은 모두 노론이다. 물론 송상도가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조선총독부의 강박과 위협에도 일부 인사들이 수작을 거부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작위를 거부한 노론 인사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판돈녕부사를 지낸 김석진으로 작위를 거부하고 그해 9월 8일 아편을 먹고 자결했다. 또한 훗날 독립운동에 가담해 작위가 박탈된 의친왕의 장인 김사준이나 김가진 같은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제외해도 집권 노론이 절대 다수인 수작자 명단은 대한제국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지배구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노론의 전신인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1623)부터 따지면 280여년, 재집권한 서인이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기한 숙종 9년(1683)부터 따져도 220여년간 집권한 정당이 노론이었다. 남인과 소론에게 잠시 정권을 빼앗겼던 때도 있지만 그 기간은 모두 합쳐도 15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 나머지 장구한 세월 동안 노론은 시종 집권당이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국왕 독살설이 유독 많은 이유도 노론 일당 전제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현세자를 비롯한 효종·현종·경종·사도세자·정조·효명세자(익종) 등 제명대로 살지 못한 국왕이나 세자들은 모두 노론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경우들이다. 노론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던 세자와 국왕이 노론과 격돌하려던 시점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정국은 다시 노론이 주도하는 체제로 회귀했다. 이는 조선 후기가 국왕 독살설이 빈번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정치구조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국왕보다 상위에 있던 노론이 나라를 팔아먹는데 조직적으로 가담했으니 대한제국은 살아남으려야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들은 망국에 가담한 대가로 귀족 작위와 경제적인 부상을 받았다. 일제는 합방공로작 수여 다음날 1천7백여만원의 임시은사금을 각 지방장관에게 내려 양반, 유생들을 지원하게 했다. 또한 친임관(親任官)이나 칙임관(勅任官) 등의 관료들에게도 막대한 액수의 '은사공채'(恩賜公債)를 주었다. 유림(儒林)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은 자서전 '벽옹칠십삼년회상기'(?翁七十三年回想記)'에서 '그 때에 왜정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고 전하고 있다. 일제는 전국의 60세 이상의 노유(老儒)들에게도 '상치은사금'(尙齒恩賜金·나이가 많은 것을 높여서 주는 은사금)을 주었다. 이에 각 지방의 유림들이 집단 반발할 조짐을 보이자 헌병 경찰이 호별 방문해 설득하거나 협박해 수령을 강요하기도 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양반 중에도 은사금 지급에 저항한 경우도 있지만 이는 일부였다. 김창숙은 은사금을 받는 양반들을 꾸짖으며 '나라가 망하니 양반이 먼저 망해서(亡國先亡士大夫), 양나라 조정에 춤추는 자들 태반이 최가 노가더라(梁廷舞蹈半崔盧)'라는 시구를 읊으며 통곡했다고 전한다. 김창숙이 읊은 싯구는 매천야록의 저자로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자살한 매천 황현(黃玹:1855~1910)이 지은 것이다. 당(唐)나라가 망할 때 대표적인 귀족들인 최, 노씨들이 양(梁)나라에 붙은 것을 풍자한 내용으로 당을 조선, 일본은 양나라로 비유한 것이다.
일제는 양반 사대부들 회유에 상당한 공을 들였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결과 일제는 보다 용이하게 대한제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사대부에 대한 현창과 함께 이런 잘못된 역사에 대해 엄정한 역사적 평가를 내려야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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