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⑥제국을 꿈꾸다

4·19, 5·16 격동기 시련·좌절…집념으로 삼성제국 이뤄

지난해 말 찾아간 일본 도쿄 제국호텔. 이곳에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던 날 호암이 투숙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호암은 쉰살이 되던 1960년도부터 잇따른 좌절과 시련을 겪었다.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경험한 그는 당시 부정축재자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오뚝이처럼 일어섰고 군사쿠데타로 고뇌의 나날을 보냈던 호텔의 이름처럼 그는 마침내 삼성이라는
지난해 말 찾아간 일본 도쿄 제국호텔. 이곳에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던 날 호암이 투숙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호암은 쉰살이 되던 1960년도부터 잇따른 좌절과 시련을 겪었다.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경험한 그는 당시 부정축재자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오뚝이처럼 일어섰고 군사쿠데타로 고뇌의 나날을 보냈던 호텔의 이름처럼 그는 마침내 삼성이라는 '제국'을 이뤄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호암은 정치적 격변기 때마다 곤욕을 치렀지만 그때마다 정치인들과의 담판을 통해 위기를 헤쳐나갔다. 박정희 대통령과 얘기하는 호암.
호암은 정치적 격변기 때마다 곤욕을 치렀지만 그때마다 정치인들과의 담판을 통해 위기를 헤쳐나갔다. 박정희 대통령과 얘기하는 호암.
대구 중구 인교동의 826㎡(250평)짜리 삼성상회는 출발 당시에
대구 중구 인교동의 826㎡(250평)짜리 삼성상회는 출발 당시에 '전빵' 수준이었지만 오늘날 삼성그룹으로 자라났다. 2008년 기준으로 총자산이 317조5천억원(자사 발표)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대의 기업집단이다. 사진은 삼성상회를 시작했을 당시 대구에서 찍은 호암의 사진.

1961년 5월 16일 아침 도쿄 '제국(帝國) 호텔'. 직전 해인 1960년 터진 4·19혁명으로 삼성의 전 계열사가 탈세혐의로 조사를 받으면서 검찰 출두까지 하는 등 '모진 시련'을 겪은 호암은 일본에 머물며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제국호텔에서 두문불출하던 호암은 이날 오전 7시, 골프를 치기 위해 호텔문을 나서려고 했다.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들으셨습니까?" 일본인 운전기사가 다급한 목소리를 던졌다.

'혁명의 주체세력은?' '우리나라가 나갈 길은?' 온갖 생각이 호암의 뇌리를 스쳐갔다.

며칠 후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됐다는 신문 보도가 나왔다. "부정축재 1호는 도쿄에 있는데 우리들 조무래기만 체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경제인 한명이 옥중에서 그런 불평을 했다는 말이 전해져왔다.

호암은 결국 쿠데타 발생 한달 뒤인 6월 26일 귀국길에 올랐다. 친분이 있던 박준규(전 국회의장) 당시 국회의원이 호암의 귀국 비행기에 동승했다.

"귀국하면 구속될지 어떨지 점을 한번 쳐보지요?" 호암이 박 의원에게 농담을 던졌다. "한국 제일의 재산가이시니 구속은 당연하겠지요." 던진 것은 농담이었지만 박준규 의원이 내놓은 대답은 진담처럼 들렸다.

◆시련과 좌절의 연속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창업, '삼성'의 깃발을 올린 호암은 삼성상회의 성공을 바탕으로 한국전쟁이라는 위기를 잘 넘겼다.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잇따라 설립하면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만 쉰이 되던 1960년부터 호암은 많은 시련을 겪고 한때 좌절하기도 했다. 삼성이 무너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기반으로 이미 1950년대 후반 우리나라 제일의 거부로 떠오른 그는 1960년 4·19혁명 뒤 탈세 등의 혐의로 난생처음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5·16 쿠데타가 터지면서 다시 한번 부정축재자로 몰렸다. 도쿄에서 귀국한 호암은 구속은 면했지만 1961년 8월 12일 군사혁명정부는 부정축재에 대한 추징 벌과금을 기업주들에게 통보했다. 27개 기업주에게 모두 378억800만환이 부과됐다. 삼성에 부과된 돈은 103억400만환으로 기업 중 전체 1위, 총 금액의 27%를 차지했다.

사실 호암이 5·16 이후 부정축재자로 몰려 벌과금을 물었지만 호암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의 '담판'을 통해 박 의장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위기를 기회로 이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호암은 박정희 의장을 만나 경제인들에게 벌금 대신 공장을 건설하게 하고 주식을 정부에 기부하는 방안을 제의해 성사시키는 수완을 발휘했다.

이런 인연 덕분에 정부의 요청으로 부정축재자로 구속됐던 12명의 기업인과 함께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으로 취임, 일생의 단 한번인 대외직을 맡게 된다.

경제를 몰랐던 박정희 의장은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워 호암을 밀어주게 되지만 호암은 또 한번 좌절한다. 바로 '한비 사건'이다.

자유당 정부 말기부터 비료사업을 눈여겨보던 호암은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뒤 당시 정부의 지원과 일본의 차관을 얻어 세계 최대규모인 연산 33만t 규모의 비료공장 건설에 나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요소비료 공정에 쓰이면서 사카린의 원료가 되는 OTSA를 밀수입했다는 논란이 정치,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엄청난 돈을 밀어넣었던 한국비료였지만 그는 위기를 정면으로 헤쳐나갔다. 호암은 한국비료 공장을 완공해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삼성이 호암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내놓은 평전인 '담담여수'(淡淡如水)는 이 한비사건을 '파란 많았던 호암의 생애에서 더할 나위 없는 쓰디쓴 체험'이라고 적고 있다. 한비 사건으로 입은 호암의 충격이 그만큼 컸다는 것이다.

◆오뚝이, 제국을 이루다

호암은 50대에 불어닥친 폭풍우를 잘 이겨내고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1960년대에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을 인수해 사업영역을 계속 넓혔고 1969년에는 마침내 오늘의 삼성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 전자사업에 뛰어들었다.

호암이 1938년 대구에서 시작한 자본금 3만원의 삼성상회는 그가 세상을 뜬 1987년에 이르러 37개 계열사에 연매출 14조원 규모의 거대 기업 '삼성그룹'으로 성장했다.

호암이 뿌려 놓은 자산은 오늘날 더 커져 있다. 국내 최대 기업이자 30만명 가까운 직원을 거느린 글로벌 기업 삼성이 자리를 버티고 있고 삼성에서 분가한 CJ와 신세계는 각각 재계 20위권에, 한솔은 중견그룹 자리에 포진하고 있다. 제국(帝國)을 이뤄낸 것이다.

대구 중구 인교동의 826㎡(250평)짜리 삼성상회는 출발 당시에 '전빵' 수준이었지만 오늘날 삼성그룹으로 자라나 2008년 기준으로 총자산이 317조5천억원(자사 발표)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대의 기업집단이 됐다.

현재 삼성전자, 삼성생명을 비롯한 64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2008년 기준 계열사 매출 총액은 우리나라 연간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5분의 1에 이르는 191조1천억원에 달하고, 임직원 수가 27만7천명을 넘는다. 우리나라 경제의 5분의 1을 삼성이 버티고 있다는 얘기다.

가장 큰 계열사인 삼성전자는 지난해 136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며 세계 최대의 전자 제품 제조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그룹 인터브랜드는 지난해 9월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가 175억1천800만달러(약 20조3천200억원)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신세계그룹도 호암의 유산이다.

이병철의 막내딸인 이명희(67) 회장이 소유한 신세계는 1997년 공식적으로 삼성에서 계열 분리됐다. 신세계는 자산총액 11조9천564억원(공정위 기준)에 14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1953년 이병철이 창립한 제일제당은 CJ그룹으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현재 이병철의 맏손자인 이재현(50) 회장이 경영하는 CJ그룹은 61개 계열사에 12조3천241억원의 자산총액을 자랑한다. 식품사업을 기반으로 생활용품, 유통, 영화관 등 다양한 영역에서 공격적으로 사업을 개척하고 있다.

이 밖에 장녀인 이인희(82)가 현재 고문으로 활동하는 한솔그룹을 비롯해 성균관대학교 등도 호암이 남긴 유산들이다.

차남인 고 이창희의 소유가 됐던 새한그룹은 1995년 삼성에서 분리돼 한때 계열사 12개를 거느린 재계 순위 20위 중반의 중견그룹으로 컸으나 외환위기 후에 대부분의 계열사가 매각 또는 부도 처리됐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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