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오일장에는 횟거리 생선이 거의 없다. 바다와의 거리가 만만찮은데다 냉장시설이 부족한 탓이다. 생선회는 거의 먹어 보질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겨울철로 접어들어 나들이 상어와 가오리가 시장에 나오면 그것도 재수 좋은 날이라야 생선회를 맛보게 된다. 이것들은 선도가 조금 떨어져도 식중독을 일으키지 않는다.
상어와 가오리는 물렁뼈 생선이다. 무를 굵직하게 채 썰고 뼈채로 썬 횟감을 고춧가루를 섞은 고추장에 버무려 식초를 좀 강하다 싶을 정도로 치면 겨울철 별미 음식으론 그만이다. 어머니는 섣달로 접어들면 시장에서 횟거리를 사 오셔서 당신이 마치 고기를 직접 잡은 어부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회를 치셨다.
##대학때 처음 맛본 회 '혀끝에 사르르'
대학에 진학하여 과모임 뒤풀이 행사때 난생 처음으로 회집에 간 적이 있었다. 대구 시청 뒤의 둥굴관이란 곳이었다. 생선은 병어 장어 가오리가 골고루 섞인 모듬회였고 값은 막걸리 한 되를 끼워서 70환이었다. 회를 별로 먹어보지 못한 나는 몇 점을 씹어보니 생선회가 혀끝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환장할 정도로 맛이 있었다.
그 후론 생선회를 맛볼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시골뜨기가 생선회를 꿈꾼다는 자체가 사치였다. 그러나 꿈은 열심히 꾸면 이뤄진다더니 그 말이 맞는 말 같았다. 학회장인가 무슨 선거가 있으면 "횟집에 모여라"는 사발통문이 돌곤 했다.
하루는 밀양이 고향인 친구가 살짜기 나를 불렀다. "우리 둥굴관에 가서 한 잔 하자." 눈에 불이 확 켜질 정도로 반가운 소리였다. 친구는 술 사러 나온 고향 선배를 나에게 소개했고 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이렇게 예를 갖춘 인사는 순전히 생선회와 막걸리 때문이었다. "졸업하고 군에 갔다 와서 취직하기 어려우면 연락하라고. 내가 항공회사 쪽으로 알아 볼테니." 공짜 술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취직 걱정까지 해 주다니. 권하는 대로 받아 마셔 몹시 취했는데 술자리는 이차로 이어졌다. 봉덕동 남도극장 부근 골목 안이었다.
깜빡 졸다 일어나 보니 친구도 선배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 혼자 무인고도에 술값 인질로 잡혀 있었다. 돈 나올 구석은 없고 기가 막혔다. 주인이 밖에서 문을 잠가버려 도망칠 수도 없었다. 나는 홧김에 술상 위에 남아 있는 술을 홀랑 마시고 뻗어버렸다. 그 때의 심정이 이랬으리라. "꽃 찾다가 꽃 못 보고 술에 취해/ 나무에 기대 잠들었더니 날은 기울어/ 나그네들 흩어지고 깨어보니 깊은 밤/ 촛불 들고 스러진 꽃이나마 찾아보노라." (당나라 시인 이상은의 '꽃 아래서 취해')
다음날 아침 주인은 호주머니와 책가방 검사를 했다. 환전 가능성이 있는 물건이 전혀 없자 입고 있던 스웨터를 손으로 가리키며 벗으라는 시늉을 했다. 아! 이 스웨터는 누나가 붉은색과 검은색의 공작실로 손수 뜨개질해 준 것인데 벗으라니. 주인은 벗지도 입지도 못하고 어중간하게 서있는 내게 "경찰을 부를까"라고 공갈을 쳤다.
##술값 대신 누나가 떠준 스웨터 건네고…
할 수 없이 스웨터를 벗었다. 주인은 책가방 속에서 철학 개론과 문화사 개론을 빼내 스웨터 위에 얹으면서 "내일까지 술값을 가져오지 않으면 이 옷과 책은 없어 질 줄 알라"며 매정하게 말했다. 도망친 친구와 선배가 너무 괘심하여 "개 X새끼"란 욕을 퍼부우며 돌아서는데 밤새 마신 탁한 막걸리가 투명한 소주로 변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생선회 한 점이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다니. 지금은 이름조차 희미한 밀양 친구는 이 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낙향하여 여태 소식이 없다. 중도 하차한 슬픔을 술로 달래다 술에 발목이 잡힌 건 혹시 아닌지. 그 친구가 몹시 보고 싶다. 만나 밤새워 막걸리나 마시며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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