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명작, why?]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 다섯명의 거리의 여인

절제된 색채로 묘사, 선의 결합으로 구축적인 공간 창출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전개된 새로운 예술운동인 표현주의(Expressionism)는 1905년 프랑스의 야수주의와 거의 같은 시기에 등장했다. 자연주의적인 사실화나 밝은 그림의 인상파 경향을 버리고 극단적이며 주관적인 개인의 감수성을 표현하기 위해 강렬한 색채와 대담한 변형, 그리고 형태의 단순화를 추구했다는 것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지중해 세계에 대립되는 북방 게르만의 풍토를 반영하고 조형적인 형식과 그 자율성에 대해 혼의 힘과 그 분출을 느끼게 해 주었다. 다시 말해 야수주의는 밝고 명랑하며 명쾌한 형태와 조형질서가 미술의 기조를 이루는 라틴 계열의 프랑스가 주도했다면, 표현주의는 북유럽의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경향과 사색적이며 내용을 중요시하는 게르만 계열의 독일이 주도해 야수주의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주관적 사조는 19세기 말 고흐와 고갱, 뭉크에서 시작해서 벨기에의 제임스 엔소르, 독일의 케테 콜비츠, 오스트리아의 오스카 코코슈카로 이어졌다.

표현주의가 정점에 이른 것은 '다리파'와 '청기사파'라는 독일의 두 그룹에 의해서였다. 다리파는 1905년 독일에서도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도시 드레스덴에서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를 주축으로 네 사람의 젊은이가 결성한 그룹이다. 드레스덴은 1896년에 모네와 세잔의 전시에 이어 뭉크 전시(1900년), 고흐 전시(1905년)가 각각 열려 새로운 미술에 대한 자각이 일찍부터 일고 있었던 지방이었다. '다리'라는 명칭은 그들의 작품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다리 구실을 하리라는 믿음으로 붙인 그룹명이었다. 그 중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1880~1938)는 잡지 《폭풍우》와 청기사 운동을 통해 《다섯명의 거리의 여인》(1913)과 《베를린의 거리》(1913)등 독특한 양식의 그림으로 표현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1917년 이후에는 스위스의 다보스 교외에서 요양생활을 하다가, 1937년 나치스로부터 퇴폐 예술가라는 낙인이 찍혀 작품을 몰수당하고 탄압받자 절망에 빠져 1938년 자살하고 말았다. 그의 작품 《다섯명의 거리의 여인》은 톱날 같은 예리한 선과 포물선 같은 곡선이 서로 대결하거나 결합하면서 화면 가득 특이한 긴장감과 움직임을 부여하고 있다. 거리의 여인 다섯명을 화면 가득히 배치시키고 있는 이 작품은 현실적 정감과 절제된 색채로 묘사돼 있으면서도, 동시에 비현실적 분위기를 조성해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화면 전체는 앞에서 말한 특징적인 선들의 강한 대결과 결합으로 구축적인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김태곤(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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