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남희의 즐거운 책읽기] 작은 씨앗을 심는 사람들

마을에 버려진 공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겨울이 유난히 춥고 길더니, 봄이 마침내 오긴 왔네요. 올해만큼 봄을 애타게 기다린 적도 없는 것 같아요. 활짝 핀 꽃들도 곱지만, 새잎들이 돋아나기 시작하니 연둣빛이 참 눈부시네요.

오늘은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책 한 권을 소개할게요. 미국 작가 폴 플라이쉬만의 '작은 씨앗을 심는 사람들'이라는 책입니다. 미국의 클리블랜드라는 도시가 배경이고요, 열세 명의 화자가 이어가는 짧은 이야기들의 모음입니다. 마을의 버려진 공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이지요.

이야기는 한 베트남 소녀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전에 농부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어린 소녀가 쓰레기더미로 가득한 동네 공터에 몰래 작은 강낭콩 씨앗을 심지요. 소녀의 이상한 행동을 눈여겨본 건너편 아파트의 한 외로운 할머니가 이웃 젊은이를 독촉해 씨앗을 돌보게 하고요. 학교에서 수위를 하는 그 젊은이는 자신도 그곳에 뭔가를 심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과테말라에서 이민 온 소년 곤잘로의 할아버지는 고향에서는 존경받는 어른이었지만, 미국에 이민 온 후엔 어린아이가 돼버렸지요. 영어도 할 줄 모르고, 길도 몰라 매번 곤잘로의 도움을 받아야 하거든요. 그런 노인이 우연히 공터에 뭔가를 심는 사람들을 보고 직접 밭을 일구게 되지요.

사람들이 몰래 내다버린 쓰레기는 공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계속 쌓여 있었는데, 그곳에서 밭을 일구는 사람들을 보고 용감한 아줌마 레오나가 나섰어요. 고등학생인 아이가 둘 있는데, 교과서보다 총기류가 학생들 사이에 더 많이 돌아다니는 학교에 다니는 터라 학교나 해당 기관을 쫓아다니며 항의하는데 이골이 났다고 하네요. 딱딱한 관공서를 상대로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는 요령을 터득했다고 할까요. 레오나는 끈질긴 전화 통화와 방문 끝에 시당국이 쓰레기를 치우도록 하는데 성공했답니다.

젊은 시절 시민운동가였던 샘의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스스로를 어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샘,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낚고 찢어진 그물코를 수선하는 어부처럼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이상을 낚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새를 이어주는 일을 평생 해왔다고 자부하는 샘도 공터에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지요. 한국에서 이민 온 세영도 등장하네요. 세탁소를 하며 열심히 돈을 벌다가 갑자기 남편이 죽어 버렸지요. 혼자서 세탁소를 꾸려가던 어느날 강도의 습격을 받은 충격으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홀로 살아온 세영도 텃밭을 통해 마음이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열여섯살에 임신을 해 미혼모가 될 처지인 멕시코 출신의 소녀 마리셀라도 뱃속의 아이를 저주하던 마음을 바꾸기 시작하네요. 생명을 키우는 일의 신비함과 경이로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옛 애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토마토를 가꾸기 시작한 커티스의 이야기도 아름답습니다. 작은 씨앗들이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요?

이곳은 미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인가 봅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이민자들과 소수의 백인들이 살고 있네요. 그들은 모두 고립돼 있고 이웃이라곤 없는 처지지요.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며 외롭게 살고 있는 그들은 돈을 모으면 가능한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어 하지요. 그런 그 곳에 공터를 중심으로 소통이 시작됐어요. 모두들 각자 원하는 것을 심기 시작하고, 수확물을 이웃과 나누기도 하는 정겨운 마을이 된 겁니다. 삭막한 도시의 한 빈민가가 사람 사는 동네로 변해 가는 과정이 마법처럼 펼쳐집니다.

(새벗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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