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쟁 끝났을 때 연대 400명 중 생존자는 10명뿐"

고향 안강전투 참가 김만조씨

경주 안강읍 양월리 출생의 김만조(81)씨는 민족의 최대 비극인 6·25전쟁을 온몸으로 겪었다.

치열했던 안강전투를 비롯해 수많은 전투에 참여해 살아 돌아왔지만 전쟁이 할퀸 그의 몸과 마음은 산산이 찢긴 듯 했다.

김만조씨가 입대 한 것은 6·25가 발발하기 3년 전인 1947년 18세때였다. 가난한 집에 입을 하나라도 덜고 군복이 멋있어 보여 동네 친구 20여명과 함께 입대를 했다고 한다. 국군이 막 창설될 당시였다.

충북 진천군에서 일등중사(하사)로 근무하고 있을 당시 6·25가 발발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불과 열흘만에 진천의 봉화산 1,2,3고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의 임무는 고지탈환에 나서는 주력부대의 진격을 위해 혈로를 개척하는 것. 7월 7일 밤 어둠 속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한참 정신없이 총을 쏘고 있는데 포탄 파편에 아랫배 쪽을 맞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부산 토성초등학교에 마련된 3육군병원에서 2개월간 치료를 받은 그는 병원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던 중에 북한군이 안강까지 밀고 내려왔으며 마침 자신의 부대인 3사단 18연대(백골부대의 전신)가 여기에서 전투를 치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측의 만류에도 배낭을 꾸렸다. 자신의 고향에서 적이 밀려내려온 데다 자신의 부대원들이 그곳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데 병원에 누워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후 김씨는 6·25 전쟁사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기록된 안강 기계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할 당시 강원도 인제에서 또다시 왼쪽 어깨 밑에 포탄 파편상을 입고 두 번째로 이송됐다.

그는 주로 아군의 주력부대에 앞서 전방을 개척하는 위험한 특수임무를 담당했다. 그래서 백병전은 수도 없이 치렀다. 그때마다 살아남았다. 김씨는 "전쟁이 끝나고 나니 우리 연대 400여명의 동기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10여명에 불과했다"며 치열했던 당시 상황을 들려주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2차례 폭탄 파편상을 입은 몸으로 제대로 일할 수 없었다. 건축현장에서 막일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20년전 부인과 사별한 그는 현재 병든 아들과 힘들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수입은 6·25참전 유공자에게 주어지는 40만원과 정부에서 지급하는 생활보조금 9만원이 전부다.

이렇게 병든 몸이 되었는데, 국가에 요구하고 싶은 것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욕심을 낼 필요가 없다. 밥은 굶지 않는다. 내 한 몸 희생해 우리나라가 잘 되지 않았느냐"고 했다.

경주·이채수기자 csl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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