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폭염 속 '도심 공공피서지' 온도 재어보니

에어컨 냉기 따라 노는 물도 다르네~

'도심 공공 피서지가 확 변했다. 이곳은 분명 시원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공공기관이나 장소가 이젠 시원하지도 덥지도 않은 그저 그런 곳이 됐다. 차리리 동네 근처나 회사 인근에 자신만의 피서 아지트를 찾아서 발굴하는 편이 낫겠다 싶을 정도. 불경기인데다 정부가 여름철 에너지 절약을 강조하며 과태료까지 부과하겠다고 나서는 판이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도심 공공 피서지를 취재하기 전과 후 기자의 생각은 이렇듯 변했다. 그래도 호텔·은행·백화점 같은 곳은 낫겠지 하는 생각도 여지없이 깨졌다. 피서는커녕 애매한 온도로 인해 더 있기도 그렇고 그냥 가려니 찾아온 노력이 아까워 잠시 머물러야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오후 기온이 33~34℃로 전국에서 가장 더웠다고 하는 6일 대구 도심 공공 피서지 7곳을 에너지관리공단 대구경북지역 에너지기후변화센터 염동대(44) 과장과 함께 온도계를 들고 찾아다녔다. 7곳은 도심의 대표적인 공공 피서지로 금방 머리에 떠오르는 곳을 정했으며, 그 속에 숨겨진 여름철 온도와 에너지 절약의 묘한 역학관계도 들여다봤다.

◆대구은행 본점, '피서 No More'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과거 주부들의 대표적인 공공 피서지인 은행. 대구은행 본점 창구를 찾아갔다. 대기 좌석에 푹푹 찌는 더위를 피하면서 여유 있게 잡지를 보는 고객들이 많을 것이라는 상상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여지없이 빗나갔다. 눈에 꼽을 정도의 사람들만이 창구를 왔다갔다 할 뿐 더위를 식히러 온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온도를 측정해 보니 26.2도가 찍혔다. 시간이 지나면서 온도는 26.5도까지 올라갔다. 정부가 적정 온도로 고시한 26도를 넘기지 않았다.

☞대구은행 성무용 인사부장의 첫마디는 "아이고, 덥죠"였다. 은행 직원들도 건물 자체가 다소 덥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6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건물 시설계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본점 창구 남녀 직원들은 단체로 맞춘 하늘색과 분홍색의 반소매 티셔츠 차림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성 과장은 "본점과 달리 영업점은 더운 날 고객들을 위해 25도까지 온도를 내릴 때도 있다"고 말했다.

◆대구그랜드호텔, '피서하기에는 다소'

은행을 거쳐 다음 도달한 곳은 대구그랜드호텔. 이날 마침 한나라당 전당대회 전국투어 첫 지역인 대구 연설회가 열렸다. 호텔 입구와 로비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온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왔다 갔다 하는 이들이 수시로 문을 여니 밖의 무더운 공기가 안으로 들어와 가만히 서 있어도 더위가 느껴질 정도. 염 과장이 온도계를 꺼내 측정해보니 27.5도였다. 호텔 안내데스크 여직원은 "사람들이 너무 북적여서 평소보다 1, 2도 높은 편"이라며 "올해 들어 가장 더운데 수시로 정당 관계자들이 들락날락하다 보니 에어컨을 틀어도 효과가 없다"고 했다.

☞호텔은 대체로 이렇게 온도가 높지는 않다. 평상시에는 25~26도 정도로 온도가 관리되고 있으며, 객실 층은 이보다 온도가 1, 2도 더 낮다고 한다. 1~3층은 아무래도 로비나 각종 이용시설이 많다 보니 온도 외부 손실률이 커 어느 정도 차이를 감수해야 한다. 객실에는 개별 에어컨이 있어 고객이 원하는 대로 온도 조절이 가능하다.

◆대구도시철도 메트로센터 지하 분수광장, '노인들의 천국'

대구도시철도 1, 2호선 환승역인 반월당역 지하에 위치한 메트로센터 지하 분수광장. 이곳은 노인들의 피서 천국이었다. 분수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시원한 분위기에서 비슷한 처지의 노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온도를 재 보니 28도 안팎을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래도 마땅히 더위를 피할 곳이 없는 노인들은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이날 만난 손영길(68·수성구 범어동)·박노학(72·서구 내당동) 씨는 "이곳에서 매일 만나는 사이인데, 무료로 지하철을 타고 이곳으로 와 오후 한나절을 보내고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루 일과"라고 했다.

☞메트로센터에는 관리사무소 측과 상인들 간에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관리사무소 측은 불경기에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지 못하는 입장이지만 입주 상인들은 더 많은 손님들이 찾도록 에어컨을 더 세게 틀라고 맞서고 있다. 지하 1층은 지상과 곳곳이 연결돼 온도 손실률이 엄청나다.

◆도시철도 2호선 반월당역 입구, '지하 2층이라 시원'

26.5도였다. 메트로센터가 지하 1층이라면 지하철역 입구는 지하 2층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외부로 빠져나가는 온도 손실률이 적을뿐더러 지하가 깊을수록 더 시원해지는 자연 에어컨 효과가 크다. 다만 지하철도 공공기관인지라 26도 아래도 내려가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 적은 에너지로 원하는 온도를 쉽게 맞출 수 있는 여건을 갖고 있는 셈. 지하철을 이용하는 손님들도 "대체로 쾌적하다"고 했으며 지하철 객차 안은 더 시원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지하철은 피서지로 그리 나쁘지 않은 듯했다.

☞원리는 간단했다. 이용객이 많으면 아무래도 온도 조절이 힘들고, 지상과 연결된 통로가 많은 곳일수록 온도 손실률이 높다. 대구도시철도공사는 객차 안을 제외하고는 지하철역 내의 온도를 26도 이상으로 조절하고 있다.

◆동아쇼핑 1층 매장 입구, '고객들 위주로'

백화점 역시 서비스 업종이라 건물 전체가 시원할 것이라 여겼지만 지하 1층 식품관을 제외하고는 25도 이상으로 온도를 맞추고 있었다. 백화점 입구 쪽은 다른 곳보다 0.5도가량 더 높았다. 동아쇼핑 김명수 시설팀장은 이달 초 지식경제부에서 백화점 온도를 25도 이상으로 맞추라고 해 각별하게 신경 쓰고 있다고 했다. 김 팀장은 "고객들은 덥다고 아우성이지만 적정 온도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건물 온도관리에 애로가 많다"며 "그래도 고객 입장에서 각 층마다 조금씩 온도를 다르게 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고 했다.

☞백화점은 고객 위주지만 에너지 관리 측면도 무시할 수 없는 게 대세. 이젠 과태료까지 부과한다고 하니 적정온도 범위 내에서만 고객들에게 시원함을 선사할 수밖에 없다.

◆한일극장 5층 매표소 입구, '젊은이들의 천국'

젊은 세대가 많은 곳이라 그런지 역시 달랐다. 7곳 중 유일하게 25도 아래로 내려간 곳이었다. 24.7도까지 온도계에 찍혔다. 극장 안 역시 이 정도 아니면 더 낮은 온도로 유지되고 있어 "극장은 시원하다"는 얘기는 변함이 없었다. 매표소 여직원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이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며 "젊은 사람들에게 가장 쾌적한 온도는 24, 25도인 것 같다"고 말했다. 매표소 옆 오락실도 시원해서인지 손님이 많았으며, 농구 등 운동하는 오락기계에도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다.

☞영화를 보러 온 고객들은 시원하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간다. 그래서 그럴까. 대구시내만 해도 영화관이 많아 서비스 경쟁이 치열하다. '빨리빨리'와 '최상의 서비스'를 요구하는 젊은층의 피서지는 조금 달랐다.

◆대구시청 민원실, '그래도 공공기관'

대구의 공공기관 1번지는 확실히 달랐다. 청사 안에 들어가니 온도가 29도까지 측정됐다. 시장과 부시장실이 있는 2층 역시 28.7도. 극도의 에너지 절약을 천명하고 있는 정부 방침을 잘 따르고 있었다. 그나마 시청에서 가장 시원한 곳인 민원실을 찾으니 온도가 26.5도. 민원실 한 공무원은 "다소 덥지만 그래도 청사 내에서 가장 시원한 곳이니까 상대적으로 누리는 혜택이라 생각하며 참고 있다"고 했다. 남동균 대구시 정무부시장은 "여름은 조금 더워야 제맛"이라며 "사무실 안도 덥지만 참을 만하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는 녹색성장을 모토로 내걸고 에너지 절약을 주요 시책으로 해 정부기관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까지 확산시키고 있다. 공공기관은 불시 점검에 잘못 걸리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적정온도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많다. 간단한 업무만 보고 나오는 게 최선.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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