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준혁아, 야구 한다고 수고했다. 고맙다"

19일 은퇴 양준혁 부친 양철식씨…'아들과 동고동락 30년 야구인생"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의 간판스타 양준혁(41)이 마침내 방망이를 내려놓는다. 18년 동안 경기장에서 숱한 묘미와 감동을 전한 그였기에 야구팬들은 이별의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다. 그의 부친 양철식(75) 씨의 아쉬움은 더욱 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먼지 풀풀 날리는 운동장에서 땀 흘리던 어린 아들이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우뚝 서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바라봤기에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늘 자신에게 철저했기에 2년은 더 선수로 뛸 줄 알았어요." 예상치 못한 은퇴선언이었기에 준비도 못했다는 양 씨는 "은퇴발표를 하기 2, 3일 전 대뜸 아버지, 이제 은퇴하렵니다. 벤치에만 앉아 있으려니 눈치도 보이고… "라며 말끝을 흐리는 아들을 보며 그동안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하는 생각에 "너 알아서 해라"고 짧게 답했다는 것이다. 19일 은퇴경기를 치르고 났을 때 양 씨는 그날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해주겠다고 했다. "야구 한다고 수고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자랑스러운 막내아들

2남 1녀의 막내 양준혁은 부친 양 씨에게 더할 수 없는 자랑이었다. 야구를 시작한 초교 4학년 때부터 "야구 잘하는 아들을 뒀다"는 주위의 칭찬을 30년간 줄곧 들었다. 아들 덕분에 유명세를 탔다. 그는 "양준혁 아버지 아닙니까?"라며 택시 요금을 받지 않으려는 운전사도 있었다고 했다.

양 씨는 아들에 앞서 조카(양일환 삼성 투수 코치)를 먼저 야구계에 입문시켰다. 형님 몰래 일환에게 야구공을 쥐어 준 주인공이다. 여덟 살 더 많은 사촌 형의 야구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양준혁은 자연스레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양 씨에겐 아들을 쫓아다닌 30년이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남아있다. "준혁이는 잘나가던 투수였어요. 고교에 올라가면서 투수를 포기했죠." 양준혁은 남도초교 6학년 때 회장기 전국대회에서 마산 성호초교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경운중에 진학해서도 에이스였다. 그러나 중 3때 소년체전에서 3일 연투로 팔꿈치에 이상이 생겼다. 더 이상 공을 던지는 게 무리다 싶어 양 씨는 대구상고(현 상원고)로 진학할 때 무조건 투수는 안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다행히 타격에도 소질을 보인 양준혁은 4번 타자를 꿰차며 고교시절 유망주로 꼽혔다. 하지만 재학 중 우승은 한 번도 못했다. 어쩌면 프로에서도 수많은 기록을 썼지만 단 한차례도 MVP가 되지 못했던 운명과 닮았다.

양 씨는 1993년 아들이 프로데뷔 첫해 신인왕을 거머쥐었을 때가 가장 기뻤다고 했다. 영남대를 졸업한 1992년 양준혁은 화려한 프로입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기생 투수 김태한에게 삼성의 1차 지명을 내주고 상무에 입단, 1년 늦게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양 씨는 "당시 OB나 쌍방울에서 거액의 몸값을 제시했지만 1년 뒤 1차 지명하겠다는 삼성의 제안을 받아들여 입단을 늦췄다.

못내 섭섭했지만, 걱정도 많았다. 아마추어에서 맹활약했던 선수들이 프로에서 이름을 알리지 못한 채 뒤안길로 사리지는 모습이 떠올랐다. 데뷔 첫해의 활약은 근심을 날려줬다.

◆소용돌이가 된 트레이드

양준혁은 3차례 타격왕에 오르는 등 특급선수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좋은 일에는 탈이 많다)라고 했던가. 1998년 타율 0.342로 수위타자에 오른 그해 말, 뜻밖의 트레이드가 양준혁과 양 씨를 충격에 빠지게 했다. 해태 임창용과 삼성 양준혁-곽채진-황두성 간의 3대1 트레이드가 추진된 것이었다.

파란만장했던 스토리가 있어 대구 팬들은 그를 영원한 삼성맨으로 기억하지만, 당사자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1999년 시즌 종료 후 선수협의회 창립총회를 주도하며 겪은 후유증도 컸다. 한국야구위원회(KBO)로부터 선수협의 실체를 인정받고 제도개선위원회 설립도 약속받았지만 그 일로 힘든 시간을 겪어야했다. 일부 동료와의 마찰과 구단과의 앙금을 씻어내지 못한 채 결국 2000년 시즌 개막 직전 LG 유니폼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양 씨는 "답답할 게 없던 준혁이가 후배들의 권익을 위해 나섰을 때 만류를 많이 했다. 연일 TV에 비쳐지는 아들 모습에 야구를 그만두는가 싶었다"고 했다.

아직 배필을 만나지 못한 양준혁을 볼 때면 더욱 그때 생각이 떠오른다. 트레이드가 있기 전 양준혁은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귀는 사람은 없었지만 결혼의사가 있었고, 집안에서도 배필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트레이드가 모든 걸 중단시켰다. "준혁이는 그 일을 겪으며 야구에만 전념했어요. 이 후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어요."

해태로 이적한 아들을 양 씨는 대구와 광주를 오가며 지켜봤다. 그때마다 혼자 지내는 아들 모습이 애처로웠다. 양 씨는 몇 년 전 독립해 아파트를 얻어 혼자 살고 있는 아들집을 가끔 찾지만 여자가 다녀간 흔적은 없더라고 했다.

◆한결같은 대구 팬들에 감동

양준혁은 LG 시절인 2001년 자신의 한 시즌 최고 타율인 0.355로 네번째 수위타자에 올랐다. 하지만 양 씨는 "좀 더 뒷바라지를 잘해줬다면 더 큰 선수가 됐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내가 해준 것이라곤 1990년대 초반 삼성의 방송중계가 잡힌 날, 녹화를 해준 것 뿐입니다." 당시 녹화한 300개가 넘는 테이프는 가보처럼 집에 보관하고 있다. 경기장에선 단추가 제대로 끼워졌는지, 인사는 잘하고 다니는지를 살폈다. 큰 덩치에 표정도 밝지 않아 미움을 받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어서였다.

2002년 자유계약선수(FA) 자격으로 다시 삼성으로 돌아올 때까지 둥지를 떠난 3년은 시련을 안겨줬지만 양준혁을 더욱 단련시켰다. 양 씨는 그때 아들을 성원한 대구 팬들을 잊지 못한다. "해태로 트레이드된 후 붉은 유니폼을 입고 대구야구장에 처음 섰을 때 대구 팬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쳤어요. 이날 홈런을 치자 모든 관중이 일어나 1, 2분간 환호를 보냈는데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상대편이 된 아들을 응원하는 관중 속에서 양 씨는 눈물을 훔쳤다고 했다. 양 씨는 술을 전혀 하지 않지만 담배를 끊지 못했다. 아들의 은퇴로 아버지마저 야구장에 나오지 않을까봐 주위에서는 "내년에도 야구장에 오이소"라는 말을 인사처럼 한다. 시름 섞인 채 내뿜었던 담배 연기를 거두고 옛일을 추억하며 야구를 즐길 날이 양 씨 앞으로 다가왔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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