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참 좋은 비

무릇 사랑이란 꽤나 많은 시간을 먹고서야 꽃을 피워내는 나무인가 보다. 그것도 때맞추어 내리는 비를 만나고서야 온전히 제 빛깔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메마른 가지를 적시는 빗물이야 반가운 단비이겠지만, 채 여물지 못한 여린 꽃잎에 퍼붓는 빗줄기는 아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미처 준비되지 않았는데 불쑥 다가왔다가, 가슴으로 느꼈을 때는 이미 스쳐 지나가버린 바람의 그림자. 엇갈린 사랑의 이야기는 영구미제의 수수께끼이기에 우리들에게 여전히 힘이 세다.

'호우시절'(好雨時節, 2009)은 '허진호 표' 사랑 이야기다. 유학 시절 서로 설렘만 주고받았을 뿐 미처 사랑이라는 감정도 확인할 기회가 없었던 남녀가,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만나 진짜 사랑을 재확인하고 다시 시작한다는 이야기이다. '좋은 비의 시절'로 직역되는 제목은, 중국 당나라 때의 시성 두보의 '봄밤을 적시는 단비'(春夜喜雨)의 첫 구절인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봄이 되니 내리네'(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에서 따왔다고 한다.

"봄이 되어 봄비가 내리는 걸까? 봄비가 내려서 비로소 봄이 온 것일까?"라고 흥얼거리는 연인의 달뜬 콧소리는 마냥 감미롭다. 줄곧 어긋난 사랑의 아픔과 돌이킬 수 없는 상처에 대한 절절함을 느릿하게 보여주던 감독의 발걸음이 한결 낭창낭창하고 사뿐사뿐하다. "사랑도 리필이 되나요?"라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는, 명쾌하고도 경쾌하게 "그렇다"고 답을 한다.

그것도 한층 더 싱그럽고 아름답게라고 말이다. 과거의 엇갈리는 기억에 대해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풋풋하고, 문득 끼어든 극적인 갈등조차 그리 심각할 틈도 없이 상큼하게 봉합이 된다. 서늘한 가을에 만나는 촉촉한 봄비처럼, 마냥 마음 풀어놓고서 쉬어갈 수 있는 말랑말랑한 동화다.

다시 사랑이란, 갈증과 샘물 사이에서 비로소 땅에다 든든한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꽃을 피워내는 나무임에 틀림이 없다.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갈증이며 샘물인/ 샘물이며 갈증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 갈증이며/ 샘물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정현종의 '갈증이며 샘물인') 가라앉는 갈증 속에 솟구치는 샘물의 희열이 있고, 흥겨운 샘물에 젖어보고서야 갈증의 고단함을 비로소 견뎌낼 수 있다.

마냥 연둣빛 봄비로 흥건한 '호우시절'의 사랑 이야기에 젖어들수록 역설적인 갈증이 나는 까닭은, 입술 근처에 미소로만 머물 뿐 가슴 밑바닥 떨림으로까지 스며들지 못한 까닭도 역시 그러하리라. 좋은 비를 담아내기에는 그 목마름이 너무 맨송맨송하다. 타는 목마름이 비로소 참 좋은 비를 부른다고.

송광익 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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