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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랑] 허벅지로 걷는 사람, 이신모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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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리는 사라졌지만 살아야 하잖아요"

50년 삶을 살았지만
50년 삶을 살았지만 '행복'이란 단어가 낯선 그에게 사라진 두 다리는 삶에 대한 새로운 의지를 만들게 하고 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이신모(54·대구 달서구 신당동) 씨는 다리가 없다. 30년 동안 양말 공장에서 일했던 이 씨에게 몸은 전 재산이었다. 5년 전부터 앓아온 신부전증과 당뇨 합병증으로 상처가 덧난 다리를 잘라낸 뒤 자신의 삶을 부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다시 잡았다. 공장을 그만둔 뒤 반 토막난 몸을 이끌고 매일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공원 근처에서 양말을 팔았다. 이 씨는 허벅지만 남은 다리를 양손으로 감싸며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세상을 등졌던 사람

15일 오후 2시 대구의 한 병원에서 만난 이 씨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자"며 이 씨가 몸을 일으키자 사라진 다리가 눈에 띄었다. 지난달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이 씨는 매일 아침 달성공원으로 갔다. 도심 속 공원은 휴식과 여유의 상징이지만 그에게 달성공원은 곧 일터였다. '한 켤레에 500원'짜리 양말을 팔기 위해 이 씨는 하루 10시간씩 공원 주변에서 리어커를 밀었다. 그는 허벅지로 걸었다. 양말은 이 씨와 질긴 인연을 맺고 있었다. 양말 공장에서 30년간 몸 담았던 그는 양말을 다리고 포장하는 일을 했다. 스스로 선택한 생계 수단이었다. 이 씨는 "공장을 그만둘 무렵에 한 달에 150만원씩 손에 쥐었다"고 자랑했다.

이 씨에게도 가족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 일찍 세상을 등진 아버지 대신 중풍에 걸린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의 삶을 이어가게 했다. 이 씨의 어머니는 언제나 바닥에 누워있었다. 어머니를 위해 아들은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냈다. 어머니가 47세 때 이 씨가 태어났다. 전쟁과 굶주림으로 3남3녀를 먼저 하늘로 떠나 보낸 부모는 그렇게 이 씨를 낳았다. 이 씨는 유년시절을 기억하기 싫어했다. 술병을 끼고 살았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렸고 매맞는 어머니는 매일 눈물을 흘렸다. 가정에서 따뜻한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이 씨가 바깥 세상과 서서히 단절됐던 것도 유년시절의 영향이 컸다. 오십의 나이를 넘겼지만 이 씨는 한 번도 가정을 제대로 꾸려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말없이 아버지를 증오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잊었을 만큼 존재를 부정하며 살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1999년 그해, 이 씨는 목놓아 울었다. 평생 사랑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간 어머니가 자신의 처지만큼이나 가여워서였다.

◆"다시 양말을 팔겁니다."

이 씨는 사랑을 주고, 또 받을 대상이 필요했다. 어머니를 잃은 그해 겨울에 이 씨는 아는 사람에게 작고 검은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 받았다. 사납기로 소문난 핏불 테리어였다. 사랑을 쏟을 아내와 자식이 없었던 그는 강아지에게 '까미'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다 쓰러져가는 대구 중구 남산동의 낡은 한옥집에 둥지를 튼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 씨가 일을 나가면 빈집은 까미가 지켰다.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 씨를 기다려주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씨를 '까미 아바이(아버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올해 3월 달서구에 있는 영구임대아파트로 들어가게 되면서 10년을 함께 했던 까미와 안타까운 이별을 해야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였을까. 까미는 이내 세상을 떠났다. 그는 까미 사진을 한 장도 남겨두지 않다는 사실에 더 슬퍼했다. "핸드폰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둘 것을…." 그에게 까미와의 이별은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슬픔으로 남아있다.

이 씨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신부전증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들려 신장 투석을 해야 했지만 병원에 갈 때마다 몇십만원 씩 나오는 치료비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양쪽 다리를 잘라낸 것도 아까운 병원비 몇 푼을 아끼다가 생긴 일이었다. 떡국이 담긴 뜨거운 냄비를 발에 쏟아 발가락에 온통 물집이 생겨도 꾹 참았다. 치료비 몇 만원이 아까웠다. 이 씨에게 병원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가는 곳이었다. 제 몸을 돌보지 않은 대가는 가혹했다. 지난달 달성공원에서 양말을 팔다가 손님 앞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채 실려간 병원에서 '급성 폐부종으로 폐에 물이 가득차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 씨를 병원으로 데려간 사람은 함께 노점에서 장사를 하던 두부 장수 박민구(가명·50) 씨였다. 그가 '두부 아저씨'라 부르는 박 씨는 3년 전부터 그와 함께 노점 생활을 했다. 이 씨는 "박 씨도 나보다 형편이 크게 나을 것이 없는 사람인데 아무 대가없이 도와준다"며 "보잘 것 없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맙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날도 이 씨는 저녁에 간식을 싸들고 찾아올 박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씨는 "몸이 회복되면 다시 양말을 팔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침마다 그를 찾아와 무료로 간병을 해주는 사람, 자신은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데 간식을 싸들고 병원에 찾아오는 두부 아저씨. 조건없이 그를 보살펴 주는 이웃들을 바라보며 이 씨는 서서히 삶의 의미를 되찾고 있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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