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 겨울이 두려운 위암 환자 이문동 씨

암셒 보다 더 무서운건 세금 고지서

위암을 앓는 이문동 씨는 다리가 불편해 화장실에 갈 때도 딸 민주 씨의 부축을 받아야 한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위암을 앓는 이문동 씨는 다리가 불편해 화장실에 갈 때도 딸 민주 씨의 부축을 받아야 한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지난달 29일 오후 대구 남구 대명2동 이문동(가명·57) 씨 집. 을씨년스러운 바깥 모습만큼이나 이 씨의 집안 공기도 차가웠다. 이 씨는 보일러 온도를 높이지 않았다. 성큼 다가온 겨울을 알리는 일기예보보다 더 무서운 건 가스비다. 위암 환자인 이 씨는 두꺼운 점퍼로 몸을 꽁꽁 싸맨 채 긴 겨울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인생의 내리막길

나는 한 번도 내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두 딸에게 하지 않았다. 몸이 약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내 고향은 경북 청송이다. 내 딸들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기억 속 고향이다. 청송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나는 집안의 희망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논과 밭을 팔아 대구로 옮겨왔다.

5남 1녀 중 둘째였던 내 교육을 위해서였다. 청송에서 고추와 담배농사를 지어 자식들을 키웠던 아버지는 대구에 온 뒤 방천시장에서 고추를 팔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다. 나는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뒤 곧장 공무원이 됐다. 중매로 아내(고명자·가명·53)도 만났다. 고향을 떠나온 보람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안정보다 변화를 갈망했던 젊은이였다. 큰돈을 벌고 싶었지만 공무원으로 받는 급여는 적었다. 10년간 일했던 직장에서 퇴직금 400만원을 받아 나와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경북 의성에서 고추를 가져와 방앗간에 넘겨주는 중간거래상으로 큰돈을 벌려 했다. 하지만 내 인생은 사업 성공과 거리가 멀었다. 2년이 채 안 돼 시장을 떠야 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의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쪼그라든 아버지의 어깨

나는 한때 자식들에게 권위 있는 아버지였다. 작은딸 민주(가명·21)는 중학교 시절 내가 무서워 교복 한번 줄여 입지 않았을 만큼 내 말을 잘 따랐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지만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해서라도 아이들 책값은 꼭 챙겨줬다. 그랬던 내 목소리는 조금씩 작아졌고 어깨도 함께 쪼그라들었다. 올해 2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 뒤 더 약해졌다. 그즈음 전문대를 졸업하고 직업전문학교에 다니는 민주를 보면 더 마음이 쓰라리다. 취업 준비에 목숨을 거는 딸의 뒷바라지는 못해줄망정 매일 침대에 누워 지내며 신세만 지는 것 같아서다.

민주는 직업전문학교에서 컴퓨터 자격증 공부를 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온다. 지친 딸아이를 맞이하는 것은 고장난 컴퓨터다. 민주가 고장난 컴퓨터 때문에 학교 전산실이 문을 닫는 시각까지 학교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컴퓨터 하나 못 사주는 무능력한 내 자신이 미웠다.

아내를 볼 면목도 없다. 아내는 갑작스러운 입원과 수술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게다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오전 11시부터 자정까지 식당에서 일해야 한다.

두 달 전 큰딸 민영이(가명·29)가 시집가던 날 나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래, 우리 딸 잘 부탁하네"라며 사위의 어깨를 두드리는 듬직한 장인이 아니었다. 투병중인 아비를 둔, 수술비 500만원이 없어 아내가 돈을 빌리러 나서야 하는 집의 딸에게 결혼식은 사치였다. 사위와 딸은 "나중에 둘이 벌어서 결혼식을 올리겠다"며 조용히 집을 나섰다.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먹먹했지만 오히려 큰딸이 나를 보듬었다.

"괜찮으니까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을 꺼낸 것도, "잘 될 거니까 걱정말라"며 올봄 수술대에 누워 있는 내 손을 잡아준 것도 민영이였다.

◆듬직한 가장이 되고 싶다

나는 자꾸 '만약'의 상황을 가정한다. '내가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이렇다할 보험 하나 들었다면 삶이 이렇게 고단하진 않았을 텐데'라며 수십, 수백 번 되뇐다.

사실 나와 둘째 동생 문철(가명·48)이를 남겨두고 6남매 중 4남매는 이미 암으로 세상을 떴다. 최근 10년 사이에 일어난 변고였다. 그 기간 동안 4남매의 목숨을 앗아간 병에 대비할 만큼 내 삶은 여유롭지 못했다. 큰형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제사는 내 몫이었지만, 제사마저 벅차 동생에게 제사를 넘길 정도였다.

장마철이면 비가 새 곰팡이 몸살을 앓는 3천만원짜리 전세방, 쌓여만 가는 각종 요금 고지서, 겨울이 다가와도 가스요금이 무서워 따뜻하게 지낼 수 없는 가난까지. 내가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지 않는 한 나아지기 힘든 현실이다.

어서 빨리 차가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듬직한 가장이 되고 싶다. 큰딸이 작은 결혼식이라도 올리고 살 수 있게, 작은딸에게 번듯한 컴퓨터를 사줄 수 있도록, 내 자식들을 품어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 싶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이웃사랑 - 위암.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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