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섞어 주문'

어떤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착오를 일으킬 때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조삼모사 이야기에서 원숭이를 어수룩하다 하고 주인은 원숭이를 속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약간만 돌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그들의 관계가 인간미 있는 소통의 배려로 보일 수도 있다.

내가 이용하는 부식 가게에는 고집이 세다 싶을 정도로 개성 있는 여인이 있다. 우선 그녀는 한 사람도 빼지 않고 인사를 건네는데 억양이 일직선이다. 또 여러 사람이 동시에 묻는 말에도 빠뜨리지 않고 순차적으로 대답을 해 준다. 무엇보다 반찬을 팔 때 나름대로 정확한 규칙이 있다. 주인의 지시대로 반찬을 저울에 올려 한 치의 오차 없이 달아 판다. 덤이라는 것이 전혀 없어도 그녀가 얄밉지 않은 것은 그녀에게서는 정직한 아이 같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 덕분에 저녁상을 차리면서 은근한 웃음이 난다.

친정 엄마가 몸이 안 좋아지면서 우리 집 김치통은 허해진 내 마음처럼 텅텅 비어 있다. 그래서 김치를 조금씩 사 먹게 되었다. 행여나 김치 가져가라는 엄마의 전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다림이 내 마음을 붙잡고 있어서 김치를 살 때는 한 번 먹을 것만 사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날도 제일 적은 양으로 깍두기 삼천 원어치와 배추김치 삼천 원어치를 주문했다. 그랬더니 그녀가 정색을 하며 두 봉지를 오천 원 이하로는 팔 수 없다는 말을 동강동강 잘라 매정하게 대답했다. 순간 그녀의 규칙을 얼른 읽었다. 그리고 다시 주문했다.

"그러면, 깍두기와 배추김치를 섞어서 육천 원어치 주세요."

내 말에 그녀는 흔쾌히 알았다고 하면서 김치를 섞어 담기 시작했다. 내 '섞어 주문'이 그녀를 만족시켜주었다. 갑자기 그녀와 나 사이에 막힌 것이 뚫린 기분이었다. 담아주는 봉지 수의 차이일 뿐, 두 주문의 값은 똑같다.

그러나 나는 되묻지 않았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그녀의 생각에 따라 주기로 했다. 그녀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은 찰나의 내 마음이었다. 봉지 하나를 받아들고 나오면서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보냈다. 그녀의 순간적인 착각에서 정제되지 않은 순수함이 보였다.

상 위의 접시에는 두 가지 김치가 섞여 있다. 먹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세상일에 어떤 편견이나 내 생각을 내려놓음으로써 타인의 생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결과가 똑같다면 시시비비하는 내 마음부터 멈추고 상대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읽어서 맞춰주는 것도 소통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주인석(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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