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 회 공연 돌파. 이는 1981년부터 품바 공연을 해온 배우 이계준(51) 씨를 대변하는 기록이다. 맑은 표정으로 인터뷰하다가도 품바 옷을 걸치니 삽시간에 표정이 능청스러워진다. 구수한 각설이 타령에 절로 춤사위가 펼쳐진다. 그는 배우라기보다 천생 '품바'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할 때도 항상 품바 복장을 챙겨갑니다. 여행 경비가 떨어지면 품바 복장을 입고 즉석에서 공연을 펼치지요. 그러면 지켜보는 이들로부터 십시일반 돈을 거둬 여행비로 충당하죠."
이 시대 마지막 남은 품바 명인으로 일컬어지는 그가 다음달 무대에 선다. 이 씨가 주연하는 연극 '왕초 품바'가 3월 15일부터 4월 17일까지 예술극장 온(대구 중구 동인동 2가)에서 공연되는 것이다.
품바는 판소리 적벽가에도 나올 만큼 오래 전부터 한민족의 삶을 관통해왔다. 품바는 조선시대 거지들의 삶의 도구였고 일제강점기 때는 일제에 대한 민초들의 저항이자 독립운동의 한줄기로 이어져 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서울에서는 거지왕 김춘삼, 한강 이남에서는 거지 왕초 천장근이었다. "품바 타령에 민족의 한과 저항의 의미가 내포돼 있죠. 후렴구인 '얼씨구'에서 '얼'은 한(恨)을, '씨구'는 들어간다는 순우리말이죠. 즉, 얼씨구는 한 타령을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같은 품바는 1970년대 후반 '1대 품바' 정규수(51) 선생에 의해 공연이 되면서 예술작품으로 승화된다. 이후 품바는 큰 인기를 얻으면서 1990년대 초 전성기 때는 품바 전문 배우가 전국적으로 12명이나 됐다. 품바는 우리 연극계의 스테디셀러이자 흥행 메이커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품바 공연 자체의 특수성 때문에 흥행에 한계가 있는데다 수익을 제작자만 챙기는 행태 때문에 배우들이 벌이가 안 되다 보니 품바를 포기하는 이들이 속출했어요. 지금은 전문 배우가 저 혼자뿐이죠."
이 씨와 품바의 만남은 방랑기가 다분했던 소리꾼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품바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품바가 자신이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후 유명한 소리꾼들로부터 소리를 배우기도 하고 충남 공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2개월 정도 거지 복장을 하고 거지 체험도 했다. "매일 그 자리에서 거지 행세를 하니까 한 칠순이 넘은 할머니가 20일치 주먹밥을 해서 '어쩌다 거지가 되었느냐'며 주기도 했어요. 그때 제 자신이 비로소 품바 공연을 할 수 있겠다 싶어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죠."
이번 공연은 초창기 품바 공연을 90% 이상 각색해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품바와는 전혀 색다른 공연이라고 한다. 예전 작품이 해방 직후와 6·25 시절 서민들의 애환과 삶을 다루었다면 이번 작품은 한 인간이 품바로 태어나서 각시 품바와 결혼하는 과정에서의 부부애와 가족애, 현실의 부조리 등을 표현한다. 그 과정에서 한 인간의 희로애락이 표출된다는 것. "출산을 앞둔 각시 품바를 병원으로 데려가는데 병원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입원을 거부합니다. 결국 각시 품바는 태어날 아이와 함께 죽음을 맞게 되죠. 돈 없는 이들에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사회적 부조리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그는 우리 모두가 거지라고 했다. 심지어 대통령조차도 국민에게 녹(祿)을 받는 거지라는 것. 단지 자리와 포장된 모습이 다를 뿐이라고 했다. "빈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가는 인생이죠. 누구나 품바 인생이기 때문에 품바 공연이 오랫동안 관객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 같아요."
이 씨는 품바 공연은 혼자서 1시간 20분가량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무대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말한다. 마당극 스타일로 관객과 오가는 대사도 많고 관객과의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만큼 배우의 내공과 에너지가 필요한 작품이다. "요즘 품바를 배우려는 후배들이 없어요. 돈벌이가 안 되니까요. 하지만 품바 만큼 서민적이고 우리 문화를 담은 작품이 없거든요. 품바가 영원하길 바라죠." 공연 문의 053)424-8347, 010-6269-6826.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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