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숨바쳐 태극기 흔든 그 뜻, 갈수록 무관심 가슴 아파"

광복회 이인술 애국지사

희미해진 젊은이들의 역사 의식은 애국지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28일 대구 동구 효목동 광복회 사무실에서 만난 이인술(87) 선생은
희미해진 젊은이들의 역사 의식은 애국지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28일 대구 동구 효목동 광복회 사무실에서 만난 이인술(87) 선생은 "우리가 죽으면 독립 운동의 역사도 함께 사라질까봐 걱정된다"며 안타까워했다. 김태형기자

"16살 때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어. 내 청춘과 목숨을 바쳐서라도 빼앗긴 나라를 꼭 되찾고 싶었지."

올해 92주년을 맞은 3·1절인 1일 오전 대구 동구 효목동 광복회 사무실.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장을 맡고 있는 애국지사 이인술(87) 선생은 목숨을 바쳐 태극기를 흔들었던 그날을 회상했다. 이 선생은 대구지역에 현재 생존하고 있는 8명의 애국지사 중 한 명이다.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이 선생은 1939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일본 유학을 위해서는 '일본인 추천서'가 필요했다. 그는 일본인이었던 영덕 어업조합장에게 "수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을 위해 일하겠다"고 맹세를 한 뒤 현해탄을 건넜다.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어. 그때 선생님이 난생 처음으로 내게 태극기를 보여줬지. 일장기가 아닌 우리나라 국기가 있다는 것이 눈물날 만큼 기뻤고 어린 내겐 충격이기도 했어."

그는 은사에게 건네받은 태극기를 가슴에 품은 채 일본 규슈 지방의 가고시마 수산학교에 입학했다.

나라를 잃은 설움은 일본 학교에서 차별로 나타났다. 일본인 상급생들은 "마늘 냄새 나는 조센징"이라며 한국 유학생들을 구박했고 매일같이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돈이 없어서 담배를 상납하지 못하면 피가 나도록 두들겨 맞았다. 설움은 곧 '나라를 되찾자'는 분노로 바뀌었다. 기숙사 생활을 했던 이 선생은 한국인 재학생 12명과 함께 '학생 조직'을 만들었다. 등교 전인 오전 5시, 수업이 끝나는 오후 6시를 이용해 기숙사에 몰래 숨어서 태극기를 그렸다. 그러다가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됐고 이 선생은 학교를 그만두고 오사카로 도망쳤다. 태극기 물결은 오사카에까지 이어졌다. 그는 오사카 이쿠노쿠 중학교에 다니는 한국인들과 힘을 보태 태극기를 만들었고 이들과 함께 수시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태극기 물결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44년 1월 이 선생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형무소로 끌려갔다. 고문은 가혹했다. 이 선생은 "사람을 거꾸로 달아서 콧구멍에 고춧가루를 푼 물을 붓는 것은 예사였고 칼로 옆구리를 찔러서 창자가 튀어나오기도 했다"며 옷속에 감춰진 상처를 기자에게 보여줬다. 이듬해 8월 광복이 되면서 그는 옥에서 풀려났고 1990년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이 선생은 요즘 젊은층의 희미한 역사 의식을 볼 때마다 가슴을 저미는 듯 아프다. 35년간 주권을 잃었던 나라의 아픈 역사에 무관심한 젊은이들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 같아서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독립을 했는지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나중에 사회 지도층이 되면 어떻게 되겠어.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땅 속에 묻히면 독립 운동의 역사도 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몰라."

지금 그에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세월의 흔적 속에 묻히는 독립 운동의 역사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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