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지은 야사(野史) 총서인 연려실기술 별집 사대고전 역설(譯舌)조에는 역관 홍순언(洪純彦)이란 인물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홍순언이 중국 북경에 가면서 통주(通州)의 한 주점에 들렀는데, 자태가 유난히 아름다운 한 여인을 보고 하룻밤 어울리기를 청했다.
그 여인이 소복(素服)을 입고 있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부모가 몹쓸 병에 걸려 모두 돌아가셨는데,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부득이 몸을 팔러 나왔다"며 목메어 우는 것이었다.
홍 역관이 장례 비용을 물으니 300금(金)이면 된다고 했다. 지니고 있던 공금을 유용해 주고 그냥 돌아서는데 여인이 이름이라도 말해주지 않으면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홍 씨라는 성만 일러주고 나왔다. 그런데 그 여인이 후일 명(明)나라 조정의 예부시랑 석성(石星)의 후실이 되었고, 조선 사신이 올 때마다 홍 역관의 안부를 물었다는 것이다. 귀국한 홍순언은 공금을 갚지 못해 여러 해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당시 조선은 종계변무(宗系辨誣)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가 이자춘(李子春)이 아닌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기록된 오명이 선조대에 이르도록 해결되지 못한 것이다. 이를 역관의 죄로 단정한 선조가 목숨을 걸고 성사시킬 것을 명하자, 동료 역관들이 대신 빚을 갚아주며 홍순언에게 그 일을 맡겼다.
사신을 따라 북경에 이른 홍순언은 석성과 그 부인의 마중을 받는다. 부인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통주에서 베푼 은혜'를 떠올렸다. 석성의 배려로 종계변무를 해결하고 돌아오는데 부인은 '보은'(報恩)이라 손수 새긴 비단까지 전했다.
병부상서의 자리에 오른 석성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명에 구원을 요청했을 때도 홍순언과 부인의 인연을 상기하며 명 조정의 반대 여론을 물리치고 조선 파병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최근 상하이총영사관의 영사들이 덩신밍(鄧新明)이라는 중국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비자 발급 편의를 봐주거나 정보를 유출시킨 사실이 드러나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더구나 영사들끼리 권력 암투를 벌이며 덩 여인과 치정 관계로 얽혀 있었다니 황당할 따름이다. 나라의 운명을 바꾼 역관의 휴머니즘과 국가의 이미지에 먹칠을 한 외교관의 스캔들…. 참으로 조상 보기 부끄럽다.
조향래 북부본부장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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