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행복칼럼] 바다 감상법

내가 서울 살 때 힘들었던 것들 중 하나는 푸른 바다를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가까이서 보면 투명하고 멀리서 보면 넓고 푸른 동해바다. 그 것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이 서울 생활의 고통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대학 다닐 때는 여름방학만 되면 천막을 싸들고 동해바다에 가서 일주일씩 살다 왔다. 그러나 의사가 된 뒤 학생 때처럼 그런 여행을 떠날 수가 없었다. 계급이 낮은 의사였으므로 밤과 낮을 구분할 겨를도 없이 바쁜 내 청춘을 흘러 보내고 있었다. 당시 내 일기는 계절도 잊었고 밤낮도 상실되고 없었다. 시간과 공간을 잃어버리고 나는 다만 치료하는 하나의 기계 아니 그 기계의 부품이 돼 거대한 대학병원의 한 귀퉁이에서 마치 볼트나 너트처럼 쑤셔 박혀 있었다. 가끔 서해를 가보지만 속만 더 답답해졌다.

나의 동해 바다 사랑을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하다. 그들은 바다란 해수욕하는 곳, 경치 구경하는 곳 그리고 가서 회를 먹고 오는 곳쯤으로 만 알고 있다. 하긴 그 것도 나쁜 것은 아니다. 이런 애정의 차이는 물론 타고 난 취향의 차이도 있겠지만 바다 감상법이 잘 못되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바다 감상법은 좀 어렵다. 비유하자면 고전 음악이나 책을 읽는 것과 흡사하다. 만남의 시작은 아무 재미도 없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 밋밋한 맛에 더욱 흥미를 잃게 된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참고 견뎌내노라면 이윽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고 나중에는 그 깊은 매력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게 된다.

바다는 햇볕이 쨍쨍한 날 가야 된다. 흐린 날은 전문가가 아니면 바다에서 느낌을 받을 수가 없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바다는 다만 검고 붉은 해를 담는다. 해가 솟아오르면 그 때도 아직 바다는 검고 탁한 색깔뿐이지만 햇볕을 반사하는 수많은 은비늘들이 나타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차츰 해가 중천으로 떠오르면 그제야 바다는 제 색깔을 띠게 된다. 처음에는 연한 파란 색이 나타난다. 그리고 진한 파란 색이 되었다가 점점 깊은 남색으로 변한다. 한 낮이 되면 바다는 푸른 계통의 색들의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파란 색. 남색, 검은 남색 그리고 연두에서 초록이 빛까지 온통 청색의 향연이 벌어진다.

바람은 보너스이다 바람 부는 날은 흰 파도가 바다 위를 넘실거려 사람들의 가슴을 설래준다. 먼 바다에서 보이는 너울부터 발아래 해변으로 몰려오는 개구쟁이 파도까지 파도는 푸름에 흰 색을 덧칠하여 그 예술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감상법은 생각을 가져야 된다. 종교인은 하나님이나 부처님을, 예술가들은 미술이나 시 혹은 소설을, 낭만 객들은 그들의 연인들을 각자가 가슴에 안고 바다를 만나는 것이다. 바다는 설교하고 할을 외치고 교향곡을 연주하며 시화전을 벌린다. 애인의 생령을 만나게 해준다. 프로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긴 시간 인내심을 갖고 뚫어지게 바다를 응시하고 그 미세한 소리까지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으면 여러 분들은 삶의 깊은 행복감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권영재 대구의료원 신경정신과 과장·서구정신보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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