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예, 술입니다!"

예술가들이 모였다. 한 잔, 두 잔 술을 마시는 사이 아름다운 밤이 깊어간다. 모두들 거나하게 술기운이 오르고, 취흥은 도도해져 갔다. 2차, 3차 술집을 전전하던 일행은, 통금시간이 가까워 오자 여인숙으로 들어갔다. 부지런히 마시다 보니 사들고 온 술이 모두 바닥났다. 모두들 한껏 들뜬 기분이라 갑자기 술이 떨어지자 흥이 깨지는 아쉬움에 어쩔 줄 몰라 한다(통행금지에 24시간 편의점도 없을 때니 답답했겠다). 이때 그 모임의 수장께서 갑자기 생각난 듯 주전자에 물을 받아오라 하고는 주전자의 수(水)를 한 잔씩 돌리기 시작했다. 일행은 맹물에 대취하여 다시 왁자지껄 즐거운 밤을 보냈단다.

오래 전 조각하는 변유복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그날 모임에서 맹물을 따른 분이 바로 미술계 원로이신 홍성문 선생님이란다. 그 어른들 맹물 마시고 대취하신걸 보면 어지간들 하시다(경지라고 해야 할지, 좀 이상한 분들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린다).

그렇다, 예술은 술 안 마시고도 취하는 것이다. 감흥에 미치고 삶에 도취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이 말랑말랑해지고, 흔들흔들하다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때. 바로 그때가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예술가들은 여러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인체에는 무해한 예, 술을 조제하느라 정작 자신들은 현실감각이 무뎌지고, 예술에 대취, 장취하여 몽롱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몸 사리지 않고 조제한 이 폭탄주가 있어서 사람들은 그나마 몸 버리지 않고 마음껏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건전하게 취할 수 있는 예술이 있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랴. 사람은 누구나 가끔씩 취해야 환기도 되고, 또 새로운 활력을 얻어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법이다. 무언가에 취하는 것은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 일이다.

그러니 알코올에만 너무 취해 몸 버리지 말고, 예술에 거나하게 취해 보심이 어떠하신지? 알코올, 도박, 마약 같은 몸과 정신을 상하게 하는 중독보다 예, 술꾼이 되어 세상을 잊어보는 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우리나라의 연간 알코올 소비량은 세계적이다. 신명과 감성이 풍부한 우리 민족은 잠재적인 예, 술고래들임에 분명하다. 나도 요즘 새로운 예술을 조제하느라 온몸을 삭이는 중이다. 조제가 끝나면 좌판을 벌여 함께 나누고 싶다. 대구에도 꽤 괜찮은 술도가(화랑, 회관, 미술관)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꽃잎 분분히 날리는 봄, 예술 익어가는 향기에 몸이 달아오르신 분들, 나비처럼 날아와 예술에 취하세요. 봄꽃 만큼이나 다양한 칵테일들이 즐비하답니다.

누군가 나에게 "예술이 뭐꼬?"라고 물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예, 술입니다!"라고 대답하겠다.

리우/미디어설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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