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매화가 드디어 피었다. 매화 피면 친구들을 불러 작년에 담가 둔 모과주를 한잔 하려고 별렀는데 어느새 매화가 피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쑥 캐는 남녀들이 보이고 산수유 노란꽃이 피고 들판엔 연두색 풀들의 면적이 넓어지고 수양버드나무의 이파리가 싱그럽다. 봄이 온 것이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시인은 말했다. 언 땅을 뚫고 냉정하게 새싹들이 고개를 내민 것이다. 나는 집으로 간다. 집으로 가는 것은 자주 집을 가지 못함도 있거니와 도시생활의 지친 몸을 풀고 작업에 대한 생각과 텃밭을 갈아서 씨앗을 심어야 하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하면 우편물부터 챙긴다. 그리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무얼 먹어야 한다. 싱크대 안의 바구니에 국수다발이 보인다. 국수를 삶고 싹이 제법 자란 부추를 자르고 쪽파 두어 뿌리를 다듬어 초고추장을 넣어 비빔국수를 만든다. 역시 약간의 채소가 들어간 비빔국수는 제법 먹을 만 하다. 다시 장국과 함께 끓인 물로 국수 국물을 만들어 먹어본다. 이것도 그럴싸하다. 화가의 감각은 요리에도 적용되는가 보다. 허기를 달래고, 가지고 온 호박씨를 양지바른 텃밭에 쿡쿡 꽂아 둔다. 대두콩도 여러 알 심는다. 물을 넉넉하게 주고 싹이 적당하게 자라면 옮겨 줄 것이다.
종묘상에 들러 몇 가지 채소 씨앗을 더 사두어야 겠다. 양살구 나무에는 봉오리가 맺혀 있고 옆집 매화에는 벌들이 앵앵거린다. 마당에는 배추꽃도 피었다. 머위잎이 돋아나고 사랑초는 풍성하게 커가고 있다. 부추도 성큼 자란 것 같고 돌나물도 어느새 떼지어 나오고 있다.
다시 대구로 나가야 한다. 약속이 있어서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버스시간을 모르겠다. 이럴 땐 한 정거장을 걷는다. 시골버스정거장 한 구역은 제법 멀다. 시골버스를 기다리거나 한 정거장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한 번씩 운동 삼아 혹은 외식으로 자장면 한 그릇을 먹기 위해 걷기도 한다. 물론 돌아 올 때는 버스를 탄다. 자장면이 빨리 소화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봄의 시골길을 걷는다. 옛날같이 비포장도로는 아니고 아스팔트 길이지만 도시의 길보다 한적하거나 들판들이 시원해서 그럭저럭 걸을 만 하다. 소나무 잎의 색이 다르다. 봄의 물이 오른 탓인가? 먼 발치의 가야산 봉우리가 멋있다. 농사를 준비하는 후배가 묻는다. 버스를 기다리면 될텐데 왜 걷느냐고 말이다. 운동 삼아 걸어간다고 대답한다. 봄이 오니 그들의 표정도 밝다. 화가들의 표정은 어떤가 생각해 본다. 생활이 어려워 늘 화가 나는 게 아닐까? 하루 이틀 걱정하는 것도 아닌데 봄이 오니 화가의 표정도 밝을 것이다.
토요일은 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에 응모한 젊은 작가들을 심사해서 뽑았다. 이 젊은 작가들을 도울 방법이란 스튜디오 작업실을 늘려서 쓸 수 있는 공간을 주는 것인데 일부만 뽑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젊은 작가들의 사정은 모두 고만고만한데 누구누구는 창작스튜디오에 들어오고 나머지는 6개월을 기다려서 다시 응모하거나 아니면 자기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생활비와 재료비를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하나같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아직 부모님의 신세를 진다고 한다. 작업에 대한 각오는 대단한데 이러한 인재들을 수용할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1년간만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더 있으면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도 않고 씩씩하게 작업할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대구가 예술의 도시가 되려면 젊은 작가들이 몰려오게 해야 한다. 거창한 프로젝트가 아니고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작업공간이 생기는 게 우선인데 마음 같아서는 다 뽑아서 입주작가로 참여시키고 싶으나 늘 한정된 공간이니 어쩔 수 없다. 이 지면을 통해서 대구시 당국에 바라고자 한다. 젊은 작가들이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더 확보해서 열심히 하는 작가들을 수용하고 타지의 작가들도 대구로 올 수 있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집으로 간다. 봄을 느끼기 위해 아니면 하는 일 없이 바쁜 일을 뒤로 하고 텃밭에 씨를 뿌리기 위해 술에 찌든 몸을 좀 쉬게 하고 새로운 작업을 구상하기 위해 나는 집으로 간다. 배낭에 적축면상추, 적치마상추, 소문난 열무, 서울배추, 흑금장파 등 씨앗을 사두었다. 나는 이 씨앗을 뿌리기 위해 집으로 간다. 가창 창작스튜디오에 텃밭을 만들어 입주작가들에게도 직접 심은 채소의 싱싱함을 맛보게 할 것이다. 나는 집으로 간다. 젊은 작가들이여! 아름다운 시절이다. 늘 씩씩하게 도전하는 정신으로 삶과 예술이 풍요로워지길 바란다.
정태경(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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