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낙동강 시대] 38]의성 동동·반용마을<2>

뽕나무 가득하던 대마들, 의성 최대 곡차으로 변해 '桑田碧踏'

동동마을 전경
동동마을 전경
동동과 반용의 드넓은 곡창지대, 대마들
동동과 반용의 드넓은 곡창지대, 대마들
곡창지대인 동동마을에는 지금도 거대한 정미소(사진 아래)가 가동되고 있고, 미곡창고(아위) 건물도 남아 있다.
곡창지대인 동동마을에는 지금도 거대한 정미소(사진 아래)가 가동되고 있고, 미곡창고(아위) 건물도 남아 있다.

용이 서려 있는 형국의 반용(蟠龍), 반용의 동쪽 문씨의 정자가 있다고 동동(東洞) 또는 문정자(文亭子), 소가 누워있는 모양새의 쇠실(금곡)이 각각 모인 의성군 다인면 용곡리.

7세기 백제의 3천 궁녀들이 나당 연합군을 피해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지 약 1천 년 뒤 세 부녀(婦女)가 왜군을 피해 낙동강 연담소에 몸을 맡긴 곳이다. 17세의 나이에 홀로된 뒤 평생 수절한 열녀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 용곡리 동동과 반용마을은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남평 문씨와 김해 김씨가 자리를 바꿔 둥지를 튼 양반마을이다. 마을 입구에서는 삼부녀정렬비와 하마비(下馬碑)가 300살을 훌쩍 넘긴 느티나무와 함께 기개와 절개를 담은 마을을 지키고 있다.

마을에는 문씨 정자의 굴곡과 애환도 담겼다. 동동과 반용은 넓은 대마(大馬)들판을 품고도 1970년대까지 홍수로 물이 넘치고, 논에 물을 댈 수가 없어 논농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마을에서 쌀 한 톨 구경하기 힘든 시절에는 무, 배추, 뽕나무를 심어 생계를 이었다. 밭농사 중심이던 대마들은 제방 축조 등을 계기로 서서히 대규모 곡창지대로 변모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제방을 쌓고 3차례의 경지정리를 거쳐 80년대 중반 양수장까지 건립하면서 천수답에서 '쌀단지'로 바뀌었다.

동동과 반용은 지조와 절개를 지닌 선비와 부녀들이 낙동강 강물이 스며든 거대한 대마들을 젖줄로 800여 년을 이어온 마을이다.

◆문씨 정자의 애환과 부침(浮沈) 이야기

마을은 낙동강이 예천 지보면과 풍양면, 의성군 다인면을 경계로 흘러내리는 곳이다. 1972년 이 3개 면이 인접한 강을 가로지르는 풍지교(豊知橋)를 건설했고, 이후 1990년 노후화된 풍지교를 폐쇄하는 대신 지인교(知仁橋)를 신설했다. 풍지교는 풍양과 지보를 잇는다고, 지인교는 지보면과 다인면을 잇는다고 각각 이름을 땄다.

1972년 풍지교가 놓이기 전까지 의성 다인과 예천 지보를 잇기 위해서는 뱃길이 유일했다. 낙동강 서쪽에는 의성 다인면 용곡리 동동'반용마을이, 동쪽에는 예천 지보면 매창리가 각각 동서를 연결하는 길목이다.

현재 28번 국도와 916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이자, 반용과 동동의 중간지점 낙동강 동쪽에 옛날 문씨의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강변 양쪽에는 나루터가 있었는데, 이 나루터는 고려 말부터 낙동강 수운 교통로의 중간 기착지였기에 천 년을 이어온 셈이다. 옛날 이곳은 소금배의 선착장이자, 나룻배가 드나드는 길목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던 곳이었다.

이 낙동강 서쪽 강변의 반용마을에 문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그 문씨가 강 건너 동쪽 강변에 정자를 지어 난간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예천군지에는 이 정자를 문씨가 세운 정자라고 '문정자(文亭子)'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낙동강 동쪽 강변 언덕 위에 널찍한 정자의 주춧돌이 남아있다

이 정자는 당초 선비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다 점차 소금배 상인과 장사꾼들이 몰려들면서 주막으로 바뀌었다. 문씨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점점 더 많은 술과 음식을 배를 이용해 날랐는데, 홍수가 날 때마다 배를 띄우지 못해 영업을 할 수 없는 게 고민이었다. 문씨는 꾀를 내 정자 마루 끝과 강 건너 자신의 집에다 큰 물레를 설치해 밧줄로 연결, 술통과 고기 등을 매달아 힘센 두 사람이 물레를 돌려 옮겼다는 것.

그렇게 번성하던 문씨의 정자는 어느 날 문씨의 선산에 타성(他姓)인 김씨가 묘를 쓰면서 갑자기 쇠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씨가 문씨의 선산에 장사를 지내려고 하자, 문씨는 김씨의 장지에 문상을 갔다. 살을 깎는 아픔을 감내하고라도 묘를 쓰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문상을 간 문씨는 장지에서 "탁주 한 병을 가져 왔으니, 한잔 드시오"라고 하면서 시퍼런 칼로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 칼끝에 꽂아 상주에게 건넸다. 묘를 쓰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문씨는 상주가 기가 막혀 자신의 허벅지 살과 술을 마시지 못한 채 묘를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상주는 문씨가 건네는 잔을 얼른 받아 마신 뒤 "술을 받았으니, 내 술도 한잔 받으시오"라고 한 뒤 역시 자신의 다리 살 일부를 베 문씨에게 건넸다는 것. 문씨는 그 안주를 먹지 못하고 결국 집으로 돌아왔고, 그 이후 문씨의 정자는 급속히 쇠퇴했다는 것. 문씨의 재산이 점차 바닥이 나고, 결국 정자도 없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당초 반용마을에 남평 문씨들이 둥지를 틀다 임진왜란으로 뿔뿔이 흩어진 이후 김해 김씨가 새로 정착한 마을의 역사와 무관치 않다. 현재 '문정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지금도 '문정자'행 표찰을 단 시내버스가 다인면 용곡리를 오가고 있다.

◆대마들과 농작물의 변천사

동동과 반용의 젖줄은 바로 낙동강물을 품은 '대마(大馬)들판'이다. 대마들은 동동의 서남쪽 서동(다인면 양서리) 뒷산의 형세에서 이름을 따왔다. 풍수지리를 하는 이들이 해방 이후 동동 마을에 인접한 서동의 뒷산 형태를 '큰 말이 목이 말라 엎드려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고 갈마음수(渴馬飮水)라고 했다는 것. 큰 말이 낙동강 물을 마시기 위해 내려오는 곳에 위치한 들판이라고 대마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김규영(83) 씨는 "옛날 묘터 보는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저 서동고을 뒷산을 갈마음수라고 지어가 그래. 큰 말이 물 먹으러 내려오는 형상이라고 인제, 들판은 대마들이라"고 말했다.

양수장 등 수리시설을 갖추지 못한 대마들에는 물기를 많이 머금은 땅에 1950년대를 전후해 무, 배추 등 채소농사가 주를 이루고, 보리와 조 농사도 일부 이뤄졌다.

특히 일제강점기부터는 물을 끌어댈 필요가 없는 뽕나무를 대마들에 대대적으로 심었다. 이후 대마들의 30%가량은 뽕나무밭이었다. 주민들 상당수는 봄, 가을로 누에를 먹인 뒤 실을 뽑아내는 업체에 누에고치를 팔아 생계를 이었다.

김건배(77) 씨는 "옛날에는 누에 암놈, 수놈 구별해 가지고 종자 누에로 쓴다고. 넉 잠 자고는 굵으만 전부 누에고치로 만들어지고 수놈으로 실을 뽑아내고, 암놈은 저거 씨를 받아서 다시 키우고"라고 말했다.

누에는 1980년대 중반까지 동동과 반용마을의 주 수입원이었다.

대마들의 곡물과 채소 수확량은 1966년 처음 제방을 쌓고 경지정리를 하면서 크게 늘기 시작했다. 이 낙동강 제방을 쌓을 때 6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동원됐다고 한다. 당시 정부에서 약간의 지원금이 나왔지만,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마을마다 할당량을 정해 공사를 벌였다는 것.

김주회(81) 씨는 "그땐 장비도 없어 인력으로 많이 하고, 평탄작업 하는 데 주민들이 애를 먹었지. 6개 부락 사람들이 다 동원돼 구간을 나눠 경지를 정리하고, 수로를 닦았지. 장비는 정부에서 일부 대고"라고 말했다.

제방을 쌓는 등 낙동강 호안공사를 벌인 뒤부터는 장마나 홍수를 통해 농사를 망치는 일은 크게 줄어들었다. 배추, 무 등 수확량이 크게 늘었고 의성과 예천 풍양 일대에 동동 채소가 질 좋기로 소문이 났다.

대마들은 1985년 용곡리 동동 옆 양서리에 양수장을 완공하면서 두 번째 획기적인 변화를 겪는다. 60년대 제방공사와 경지정리 이후 양수장이 들어서고 두 차례의 경지정리를 추가로 거치면서 채소 외에 쌀 한 톨 구경하기 힘들었던 대마들에서 본격적으로 논농사가 시작된 것이다. 대마들이 '물을 만난 것'이었다. 배추, 무, 조와 뽕나무 밭이던 대마들은 이제 거대한 논으로 변모했다. 의성 최대의 곡창지대가 된 것이다. 상전벽해가 아니라 '상전벽답(桑田碧畓)'이 된 셈이다.

김종주(64) 씨는 "용곡리, 양서리 합쳐 6개 부락 중 제일 큰 들이지요, 이 앞에 대마들이. 저기 앞이 한 천 마지기 조금 넘든지 그래요. 천오십 마지기인가"라며 "우리는 대마들을 쌀단지라고 부르지"라고 말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이가영'김수정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권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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