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6월 1일은 우리에게 여러모로 의미 있는 날이다. 정부가 공식 기념일로 지난해 지정한 뒤 처음 열리는 '의병의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은 1592년 4월 22일 경남 의령에서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처음 의병을 일으킨 날(양력)을 기준한 것이다. 신공항 백지화, 수도권 규제완화로 지역민들의 시름이 큰 상황에서 영남지역에서 묵묵하게 구국(救國)의 뜻을 펼친 조상들의 정신을 오늘날 되돌아볼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구국의 씨 뿌린 영남의병
"임진왜란은 영남 의병의 씨를 뿌렸고 영남 의병은 우리 의병의 시작이 됐습니다." (사)임란호국영남충의단전시관의 곽경열 관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대구 효목동 망우당 공원 내 마련된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2006년 전시관이 들어섰지만, 무관심으로 비록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평소에는 텅 비다시피 했다. 전시관 앞 곽재우 장군 동상 아래에 있는 영남의병 315위를 모시기 위해 1998년 건립된 임란호국영남충의단을 찾는 사람도 드물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곳엔 임란에 관해 궁금한 점, 상투머리에 갓쓴 영남의 유생들이 어떻게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의병활동에 나설 수 있었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었다. 지난주말 전시관에서 만난 20대 젊은 남녀는 "대구에도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과 영남에서 일어난 의병이 이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며 "나라를 구한 것이 영남의병이란 것은 더욱 몰랐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1592년 4월 13일,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임진왜란이 터지자 놀란 선조는 4월 30일 피란에 나섰고 한양은 5월 2일, 2개월 만인 6월 14일에는 평양성마저 점령당했다.
'의(義)로 뭉친 군인' 의병은 4월 22일 의령 곽재우 의병장을 시작으로 영남에서부터 일어났다. 3도(경상'전라'충청도)로 퍼져나간 의병은 지역 유생, 사족(士族), 퇴직관료를 중심으로 향토방위에 나섰다. 나라의 부름 없이 스스로 일어난 것이다.
피신한 선조는 "내가 생각건대 영남지역은 실로 우리나라 인재의 부고(府庫)이다. 60여 열군(列郡)에 충의의 선비로 팔을 걷어붙이고 비분강개하며 국가적 위기에 뛰어들 사람이 어찌 없으랴. 내 비록 도적을 끌어들인 책임은 있으나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은 것이 대의이니 너희들 가운데 어째 강개의 충의가 없을쏘냐"라고 호소했다.
불길처럼 번진 의병을 두고 선조 때 학자 성혼(成渾)은 "왜적이 사방에서 몰려와 수령들이 다 도망쳤고, 남쪽의병이 처음 일어나서…관리들과 백성들(吏民)들이 바야흐로 나라를 대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다소나마 백성의 뜻을 돌려서 내 나라가 있음을 알게 한 것은 남방 의병의 공이다"고 평가했다.
의병의 기병으로 왜란 개전 초 50여 개였던 의진(義陣)이 11월엔 100여 개로 늘었다. 왜란 이듬해 당시 수군을 뺀 경기'3남의 관군이 8만4천500명이었다. 의병 수가 2만2천600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 경상도 의병이 1만2천 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특히 현풍'창녕 등에서 활약한 곽재우, 고령'거창의 김면(金沔), 합천 정인홍(鄭仁弘) 등 영남 3대 의병장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아울러 대구 동화사에서는 임유정(任惟政) 사명당(四溟堂)대사가 승군(僧軍)사령부를 두는 등 팔공산은 승병들의 구국 근거지가 됐다.
영남지방에서 시작된 임란의병은 바로 훗날 구한말(舊韓末)과 일제 독립 의병투쟁의 뿌리가 됐다. 외침이 잦은 우리 역사에 임란 중의 의병처럼 백성들의 항전이 광범위했던 것도 드물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곽경열 관장은 "임란 당시 영남의병은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등 유학의 정통 학맥을 이은 유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어느 지역보다 활발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또 "나라 위해 신명을 바치는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영남 선비정신이 의병정신으로 승화했고 오늘날 영남 정신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800여 의병'민'관'군 전원 순국
전적지에 관람객이 없기는 상주도 마찬가지였다. 따사로운 봄볕 속 800여 임란 순국 희생자를 모신 상주 북천 옆 임란북천전적지에는 관람객이 몇 없었다. 뒷산인 자산(子山)을 찾는 등산객도 그곳에서 의병들의 피가 내처럼 흘렀던 400년 전의 아비규환을 아는 이가 없었다. 함께 전적지를 둘러본 상주향토문화연구소 곽희상 연구위원은 "왜군은 파죽지세였고 관군이 도망간 자리를 의병 등이 지켰고, 상주 선조들은 구국의 일념으로 나라에 목숨 바쳤다"고 숙연해 했다.
북천에서 장렬히 전사한 상주 첫 의병장 김준신(金俊臣) 등 상주민들에게는 처절한 보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대는 김 의병장의 청도 김씨 세거지(화동면 판곡리)를 습격했다. 왜적들의 칼날과 행패를 피해 부녀자들은 지금은 비록 작은 연못이지만 당시 1천600여 평에 이르렀던 마을 앞 저수지에 투신해 자결했다. 아들 백일(百鎰)만 겨우 노비 생이(生伊)와 함께 살아남았을 뿐이었다고 김 의병장의 14대 지손(支孫)인 김재궁(金在躬) 상주충열사제전위원장이 전했다. 그는 "아마 당시 50여 호 100여 명의 집안 사람과 주민들이 도륙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일 상주지역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고을 전체가 부역이나 조세 일부 면제 혜택을 받는 '은전(恩典) 고을'이 됐다고 지역 역사서인 상산지는 전하고 있다.
임란의 상흔을 간직한 못은 현재 낙화담(落花潭)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고 그 참혹한 광경을 지켜봤을 수령 500~600년의 연못 옆 소나무는 경북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1973년에 세워진 노산 이은상의 '낙화담 의적천양시'(落花潭闡揚詩)가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임진년 풍우 속에 눈부신 의사 모습/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았네/ 절사곡(節士谷'절곡은 김준신의 호) 피묻은 역사야 어느 적에 잊으리라// 설악(雪岳) 높은 본대로 이르는 말/ 꽃은 떨어져도 열매는 맺었다고/ 오늘도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북천에서 전사한 800여 명 중 김 의병장을 비롯한 8명은 아름다운 이름이나마 후세에 남겼지만 나머지 이름없이 산화한 의병'민'관'군은 '무명열사'란 위패 하나만 충렬사(忠烈祠) 내에 남아 있을 뿐이다.
◆경북 의병장들의 호국 정신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는 낙동강을 따라 경남북을 신출귀몰하며 왜적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최고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또 영천 의병들은 왜적에 빼앗긴 성을 최초로 되찾은 영천성 복성(復城) 화공전(火攻戰)에 성공했다. 의병장 권응수(權應銖)와 정세아(鄭世雅) 부자, 정담(鄭湛)'정대임(鄭大任)'정대인(鄭大仁) 등 3천500여 명이 출전한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의 7월 27일 복성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전투는 임란 3대 대첩에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특히 정담은 뛰어난 전략을 세워 제갈공명과 같다는 감탄을 자아냈으며 정세아의 큰아들은 경주성 탈환 전투에서 아버지를 구하고 자신은 장렬하게 전사해 충효정신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영천시청 정상용 공보담당은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겠으며 임진왜란 때 영천 복성과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래서 후세 제현들은 영천성 회복으로 영남을 얻었고, 영남을 지킨 것은 나라를 구했다'(無永無嶺 無嶺無國)는 평가를 들었다"고 전했다.
이외에 경주에서 1천400명의 의병들과 활동한 김호(金虎) 의병장, 예안(禮安)에서 일어나 경상북부지역을 제압한 김해(金垓), 안동의 임흘(任屹)'우성전(禹性傳), 상주의 정경세(鄭經世)'조정(趙靖), 고령 김면, 인동 장사진(張士珍) 등 의병장이 줄을 이었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100년 전투 경험과 당시 동아시아 최신 첨단무기인 조총을 앞세우고도 의병이라는 예상치 못한 복병으로 인해 5만 명이 넘는 병력 손실만 낸 채 7년 전쟁을 지고 돌아가야 했다. 영남의병들이 보여준 호국 정신은 한국의 혼으로 승화되는 밑거름이 됐다.
정인열기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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