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주에 대한 애착이 유난했다고 한다. 40년 전 1971년 6월 경주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는 산업화에 따른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과 농촌 인구 및 관광객 감소 등으로 인구 10만 명에 불과한 경주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 천년고도 경주의 관광 활성화를 위해 그해 7월 경주 관광종합개발계획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많은 볼거리들이 마련됐다.
그가 후일 1970년대 중반부터 서울과 수도권 집중화, 인구 과밀화 등에 따른 부작용 해소를 위해 수도 이전에 대한 구상을 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 계획 때 주문 하나를 더 했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것은 바로 1천 년의 신라 패망에는 수도인 왕경에로의 집중화에 따른 부작용도 한 원인이 됐다는 사실을 뒷사람들이 경계할 수 있도록 패망 관련 자료관이나 전시관이라도 하나 만들라고 했으면 어떠했겠느냐는 것이다.
신라 통일로 수도 서라벌은 '오늘날의 수도권'이었다. 모든 것이 서라벌로 집중됐다. 짚으로 지은 초가집은 없고 기와집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며, 더 이상 집 지을 곳도 마땅찮았을 정도였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지을 만큼 '잘나가는' 도시였다.
2011년 경주 인구 20여만 명에 비해 통일신라 경주 인구는 17만 9천 호(戶) 즉 9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중국 당(唐)의 장안 인구가 100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경주의 집중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수치이다. 이 때문에 숯 공급을 위한 경주 지역 임야의 벌목은 늘어났고 이로 인한 홍수와 범람의 피해 등 왕경 집중화에 따른 문제는 적잖았으며 이는 신라 패망의 한 원인이 됐다고 어느 역사학자는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수도 집중화와 비대화에서는 '지방'과 '지방민'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이에 따른 지방 홀대와 지방의 황폐화는 국가에 대한 불만으로 차곡차곡 쌓였을 것이고, 문화 격차에 따른 소외감과 박탈감은 통치자의 짐이 됐을 것이다.
이에 신문왕 같은 임금은 통일 직후인 689년 달구벌(대구)로 수도를 옮기려 했다. 하지만 기득권층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결국 막강한 왕권에도 포기해야만 했다. 서울 언론, 정치인, 관료 등 서울'수도권 예찬론자들이 득실거리는 지금 상황과 뭐 다른가. 게다가 지금은 공약조차 지키지 않으니.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정인열 중부지역본부장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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