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전 유럽에서는 왕이 고의로 저질 화폐를 유통시키는 일이 다반사였다. 전비(戰費) 조달 등 재정상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금화나 은화에 구리 등 다른 금속을 섞어 유통시킨 것이다. 이는 국민의 부를 도둑질하는 것이다. 그러자 정상 주화는 금고 속으로 퇴장하고 저질 주화만 유통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바로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법칙의 저작권자가 토머스 그레셤이 아니라 지동설을 주장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라는 사실이다. 영국 왕실 재정고문이었던 그레셤이 엘리자베스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 코페르니쿠스는 그보다 훨씬 앞서 펴낸 '화폐론'(1517)에서 "저질 주화가 유통되면 금 세공업자들은 양질의 옛 주화에서 금과 은을 녹여내 무지한 대중에게 팔 것이다. 새 열등 주화가 옛 양화들을 몰아내기 위해 도입된다"고 했다. 저작권자가 이렇게 바뀐 것은 헨리 매클라우드라는 영국의 경제학자가 1858년에 양화 구축 현상의 최초 발견자가 그레셤이라고 주장한 것이 그대로 굳어진 때문이다. 그래서 동구에서는 그레셤의 법칙이라 하지 않고 '코페르니쿠스의 법칙'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군주가 주화를 가지고 장난을 치자 백성도 이에 가세했다. 금화와 은화를 보이지 않게 조금씩 깎아낸 것이다. 그 결과 유통된 지 오래된 주화는 무게가 현저히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액면가로 유통되는 혼란이 빚어졌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화폐당국은 동전 테두리에 정교한 빗금을 넣었다. 주화를 조금만 깎아도 금방 표시가 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대부분 국가의 동전 테두리에 미세한 빗금이 새겨져 있는 유래다.
10만 원권 수표 발행 비용을 줄이고 거래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발행된 5만 원권 지폐가 사라지고 있다. 3월 현재 5만 원권 유통 잔액은 1만 원권의 20조 761억 원보다 많은 20조 1천76억 원이나 되지만 시중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탈세나 범죄 자금이 돼 음습한 지하로 숨어들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김제 마늘밭에 묻어둔 불법 도박 자금 대부분이 5만 원권이었음이 이를 뒷받침하는 듯하다. 범죄라는 악화가 5만 원권이라는 양화를 구축하는 또 하나의 그레셤의 법칙이 생겨나고 있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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