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사랑 산사람] 전남 광양 백운산

지리산 스카이라인'섬진강 벚꽃물결'다도해 '3색 미감'

100리길 지리능선이 파노라마를 그리고, 섬진강 줄기가 실타래처럼 펼쳐진 곳. 천리 길을 뻗쳐온 호남정맥이 우뚝 솟아오르고, 한려수도 다도해의 섬들이 점으로 이어지는 곳. 바로 백운산(1,218m)에서 만날 수 있는 경치다. 조망으로 유명한 명소들은 많지만 백운산처럼 산맥, 다도해, 강의 '3색 미감(美感)'을 즐길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한반도 최남단 광양은 화신(花信)이 제일 먼저 상륙하는 곳이다. 광양 주변엔 산동마을 산수유, 다압 매화, 하동 벚꽃이 봄꽃 벨트를 이루고 있다. 봄의 사열대, 광양 백운산으로 떠나보자.

◆100리길 지리산 전 구간 풀샷으로 감상

지리산 주능선을 전경(全景)으로 전망할 수 있는 곳으로 하동의 삼신산과 함양의 삼정산을 든다. 하지만 지리산의 조망처로 백운산을 빼놓을 수 없다. 두 산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형세여서 성삼재-반야봉-천왕봉-중봉에 이르는 전 구간을 풀샷(full shot)으로 감상할 수 있다. 마니아들은 백운산을 이젤(畵架) 포인트라고 부른다. 화가들이 캔버스에서 한발 물러나 대상을 보듯 이곳은 지리산을 멀리서 감상하기에 최적의 포인트다.

백운산은 장수 주화산에서 지맥을 일으켜 전라남북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호남정맥의 종점이다. 낙동정맥의 금정산이나 무학산에서 보듯 상당수의 정맥은 바다나 강을 만나면 맥을 펼치지 못하고 바다로 자맥질해 들어가거나 꼬리를 내리기 일쑤다. 그러나 백운산은 다르다. 강(섬진강)과 바다에 휘둘려 감겨 있지만 산세가 전혀 무뎌지지 않는다. 오히려 구례에서 섬진강 수계를 이어받아 마지막 150리길 물길을 광양만까지 인도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겨울은 시작과 함께 모든 색을 거두어 가고 봄은 빼앗긴 색을 되돌려 놓는 섭리로 절기를 시작한다. 색(色)을 사이에 둔 충돌인 셈이다. 동백, 산수유, 매화, 진달래…. 지금 전국은 봄꽃들의 다툼으로 소란스럽다.

취재팀은 '화투'(花鬪)의 현장인 광양을 찾았다. 매화로 일전을 치른 다압마을에는 소임을 다한 매화들이 새순에 자리를 내주고 열반에 들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오늘 등산로는 진틀-병암폭포-신선대를 거쳐 정상에 오른 후 백운사-용문사로 내려오는 약 8㎞ 코스.

◆산수유, 생강나무, 진달래의 화려한 색감

들머리 진틀엔 전국에서 몰려든 등산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길옆 농가 울타리엔 살구꽃과 배꽃이 수줍게 피고 등산로엔 산수유, 생강나무, 진달래가 천연색의 파스텔톤을 펼쳤다.

백운산은 강, 바다, 산이 고르게 발달한 덕에 식물생태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남한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식물의 종류가 다양하다. 약성(藥性)도 뛰어나다. 분포식물 965종 중 650종이 약용식물이라고 한다.

병암폭포를 지나 신선대까지 오르는 구간은 급경사의 연속이다. 아직 신록이 제 색깔을 펼치지 못한 등산로는 삭막하다. 가끔씩 도솔봉 쪽으로 트이는 시원한 조망에 피로를 잊는다. 1시간 30분 만에 드디어 신선봉에 도착했다. 직벽에 가까운 등로가 일행을 위협한다. 네발로 기고 로프와 철계단에 의지해 힘겹게 봉우리를 오른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펼쳐지는 조망에 가슴은 한껏 부풀어 오른다. 제일 먼저 웅장한 지리능선이 연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화가라면 이곳에 화구(畵具)를 놓겠다 싶을 정도로 지리능선이 황홀하게 펼쳐진다. 내게 붓은 없지만 카메라는 있으니 한껏 줌을 당겨 산을 렌즈에 담는다. 서서히 산 밑으로 시선을 거둔다. 유려한 S라인을 따라 익숙한 은빛 비늘이 시선을 간지른다. 섬진강이다. 산 너울에 가려 한 뼘밖에 보이지 않지만 벚꽃으로 띠를 두른 강의 자태는 매력적이다.

광양만 다도해까지 줌으로 당겨보려 했지만 과욕이었을까. 역광과 해무가 접근을 막는다. 3색 미감(美感) 중 두 가지를 즐겼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인파가 몰리는 주말엔 신선대에서 조망을 끝내는 것이 좋다. 정상엔 걸터앉을 공간이 변변찮다. 더구나 정상엔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인파 속을 비집고 상봉(上峰)으로 오른다. 정상에서 매봉 쪽 능선에 겨우 눈맞춤을 하고 백운사를 향해 나선다. 모퉁이 하나를 돌았을 뿐인데 산길은 적막하다. 한적한 등산로, 이제야 소음에서 자유로워진다. 잠시 잃어버렸던 사색도 되찾았다. 사위(四圍)는 고요하다. 철쭉 가지를 스치고 나온 바람이 봄 향기를 실어 나른다. 산새들도 한가로이 숲을 유영하며 낮게 운다.

◆도선국사, 백운산에 절 세우고 35년 수도

산죽 길을 한참 걸어 백운사에 이르렀다. 지금은 공사 중이라 철골과 건축자재들로 경내는 어수선하다. 백운사 일대는 의상, 원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고승으로 불리는 도선국사가 35년 동안 수도를 한 곳이다. 대사는 신라 말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려 애썼고 신라 왕실은 수차례 입조(立朝)를 권했다. 왕조가 바뀌고 고려 개국 후에도 여러 번 러브콜을 받았다. 그는 응하지 않았다. 이런 인품과 학식에 대한 왕건의 존경은 훈요십조에도 잘 나타난다. 숭불(崇佛)을 국시로 삼았던 고려도 도선의 풍수사상을 국정의 근간으로 삼았다.

도선국사는 정치적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전국을 순례했다. 오랜 수행과 구도 과정을 거쳐 독창적 이론인 풍수사상이 완성됐다. 백운산 일대에는 108개 암자가 들어섰을 정도로 이곳은 우리나라 도참, 풍수사상의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

백운사를 내려오는 길. 계곡은 깊고 물소리는 고요하다. 1시간여를 걸어 용문사에 도착했다. 절 밑 동곡계곡의 물소리가 정겹다.

도선은 길지, 명당을 찾아 전국을 주유했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거처를 정한 곳이 바로 광양 백운산이다. 한마디로 광양은 우리나라 풍수와 지리의 결정(結晶)이라 하겠다. 풍수와 명당의 과학적 실증을 떠나 백운산에서의 '잠시 머무름' 자체만으로 무척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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