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옛길기행] (17)영양 일월산 옛 국도길

일제에 일월산 광물 수탈길, 자연치유 생명길로 재탄생

일월산 대티골마을 사람들이 직접 나서 조성한
일월산 대티골마을 사람들이 직접 나서 조성한 '아름다운 숲 길'에는 하늘을 뒤덮은 원시림과 울창한 소나무 수림대가 곳곳에 있어 도심에서 찌든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생명의 길로 인기를 얻고 있다.
대티골마을발전위원회 권용인 위원장이 각종 농기계 등을 이용해 만든
대티골마을발전위원회 권용인 위원장이 각종 농기계 등을 이용해 만든 '자연치유생태마을 대티골' 조형물에 앉아 호랑이를 어루만지고 있다.
대티골 마을 안내판
대티골 마을 안내판
대티골 외씨버선길 조형물
대티골 외씨버선길 조형물

일월산은 영산(靈山)이라고 불린다. 높이 1,219m의 일월산 자락에 몸을 숨기고 살아오는 민초들의 삶은 질곡과 애환으로 얼룩져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산을 뜨면 세상을 뜨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듯, 일월산의 신령스런 영험이 언젠가는 세상을 변하게 하리라는 야무진 신념으로 산 밖을 나서지 못한 채 그곳에 몸을 누이고 있다.

샘물내기'왕바우골'그루모기'칡밭모기'쿵쿵모기'대티골…. 이 얼마나 아름답고 정겨운 이름들인가. 이름만 들어도 그곳 사람들의 곰삭고 정겨운 얘기들이 솔솔 들릴 듯한 일월산 자락의 숱한 세월은 질곡이었다. 아픔이었다. 애환이었다.

산 허리를 잘라 속살을 허옇게 드러낸 채 조성된 국도 31호선 길. 일월산 등줄과 목덜미를 휘감은 흉물이다. 일제가 일월산에서 캐낸 광물을 빼앗아 가기 위해 만든 수탈의 도로다. 민족의 아픔이 묻어 있는 도로다. 민초들을 착취했던 아픈 역사다. 해방 이후에는 일월산 자락을 풍요롭게 했던 우량목들을 벌목하는 데 이용됐던 훼손의 길이다.

이 길이 새롭게 꾸며지고 있다. 아픔과 수탈, 흉물의 길이 치유와 반성과 아름다운 길로 거듭나고 있다. 사람에 의해 생채기 난 일월산 도로가 사람들의 손으로 자연화되고 생태 친환경화돼 간다. '아름다운 숲 길' '외씨버선길'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민족 수탈, 민초 아픔 간직한 옛 국도 31호선

일월산 자락을 잘라 영양군 일월면과 봉화군 재산면을 잇는 옛 국도 31호선. 이 도로는 일제가 일월산에서 캐낸 광물을 봉화 장군광업소로 옮기기 위해 닦았다. 15년 전 지금의 잘 포장된 국도가 뚫리기 전까지 근근이 이용되면서 온갖 애환을 간직한 길이다.

모양도 그저 토끼길을 면한 좁고 꼬불꼬불 초라한 형색이다. 이 국도에는 아직도 '국도 31호선' '영양 28㎞' 등 빛바랜 이정표가 남아있다. 마치 "나는 국도다"라 소리치는 것처럼.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아래댓티, 윗대티 자연부락을 스쳐 일월재를 넘어 봉화군 재산면 갈산과 소천면 임기로 이어지고 법전면 어지리 노룻골에서 국도 35호선과 맞닥뜨린다. 녹음이 짙푸르기 시작한 초춘(初春)이지만 길섶에 발목을 빠지게 하는 낙엽은 지난 늦가을 그 자리에 몸을 내린 그대로다. 사람의 발길조차 경건하게 만든다.

이 길은 일제 강점기 일월산 광물을 옮기기 위해 만든 수탈의 길이다. 길이만도 20여㎞, 민초들이 징용으로 끌려와 길을 닦는 데 내몰린 고통의 길이다. 용화리 부근에 대규모 탄광촌이 들어서고 수천여 명이 징용돼 군수물자에 필요한 광물을 캐내고 도로를 닦는 데 내몰렸다. 하루 15시간 이상의 고된 노역이 1년 이상 계속됐다.

해방 이후 한동안 쓸모없이 내버려졌던 이 도로는 1960년대 들어 일월산과 영양지역 국유림에 대대적 산판이 활기를 띠면서 다시 분주해졌다. 한국전쟁판에서 흘러나온 소위 '제무시'(GMC사 트럭)가 올곧아 미끈한 육송을 싣고 이 도로를 쉴 새 없이 넘나들었다.

이 길에 대해 김영환(72'일월면 문암리) 씨는 "일제 때는 빼앗기만 했어. 많은 사연들이 있는 도로야. 해방 이후에는 나무를 가져가는 대신 돈을 돌려주었으니 역할이 달랐지. 얼마나 많은 우량목들을 베어 갔는지 일월산은 잡목으로 뒤덮여 버렸어"라고 말했다.

◆수탈 아픔 딛고 생명의 땅으로 거듭나는 '대티골'

일월산 쪽 옛 국도 31호선 길이 시작되는 곳이 '대티골'이다. 그만큼 이 골짜기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 국도길은 누구보다 수탈의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이곳 대티골 사람들은 수탈의 아픔을 딛고 생명의 땅으로, 반성과 치유의 길로 거듭나게 만들어 가고 있다.

김종수(62) 이장을 포함해 32가구 53명의 주민들은 '자연치유 생태마을 대티골'이라는 슬로건으로 지난 몇 해 동안 구슬땀을 흘려오고 있다.

2008년 이 마을은 경북도 지원 '부자마을 만들기 사업'에 선정되고 2009년 생명의 숲이 주최한 '아름다운 숲길' 공모에서 어울림 상을 수상했다.

이 마을 주민들이 옛 국도길과 아름다운 일월산 자락 길을 다듬고, 끊어진 곳을 잇고, 좁은 길을 넓혀 대티골 숲길을 조성한 것. 4㎞의 옛 국도길과 2㎞의 칠밭길, 2㎞의 댓골길로 이름 지어진 이 길은 '자연'치유'생태'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일제 36년 수탈의 아픔은 자연 복원력으로 치유하고, 칠밭길에서 만나는 300여 그루의 금강 소나무 수림대와 하늘을 뒤덮은 터널 숲길은 도심에서 찌든 몸과 마음에 '해와 달의 기운'을 가득 채워 준다.

여기에다 지난해부터 지식경제부에서 지원해 경북북부연구원이 추진하는 '외씨버선길'이 새로운 명품길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청송군과 영양군, 봉화군과 강원도 영월군 등 4개 군이 함께 'BY2C 외씨버선길 조성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최근 조성 완료된 영양지역 1차 외씨버선길도 이미 대티골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옛 국도길을 따라 조성됐다. 용화리 천문사 입구에서 시작되는 옛 국도길을 따라 텃골, 깃대배기, 깨밭골을 지나 칠밭모기까지 이어진다. 그곳에서 외씨버선길은 오른쪽으로 계속되고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은 왼편으로 꺾어진다.

오랜 세월 수탈과 훼손의 일월산 국도와 군사도로가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치유와 자연의 길로 재탄생하고 있다.

대티골마을발전위원회 권용인(53) 위원장은 "대티골은 옛 국도길을 이용해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아늑한 휴식처가 되는 마을로 만들고 있다. '정'을 나누기 위해 주민들은 황토 구들민박을 지어 운영하고, 8㎞의 숲길에서 '휴식'을 누리고, 들과 산에서 나는 풀들로 생명밥상으로 '식'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티골 사람들이 준비하는 축제 '봄의 미각과 휴식'

대티골 사람들은 이달 22일부터 24일까지 '대티골 봄'봄 축제'를 마련한다. '2011, 대티골의 봄-봄의 미각과 휴식'이라는 주제로 마련하는 마을축제는 주민들이 스스로 준비해 일월산 밖 사람들을 초청하는 첫 축제다.

대티골 사람들은 이번 축제를 통해 함께 바람직한 지역문화의 미래를 꿈꾸고 나누는 자리가 되길 희망한다. 지역주민과 지역사회단체, 방문객이 함께 만들고 즐기면서 서로 간의 상생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꿈에 부풀어 있다.

게다가 대티골 마을 사람들이 자랑하고 있는 '옛 국도길과 칠밭길, 댓골길 등 아름다운 숲 길' '풀누리소반이라고 이름 지은 산과 들, 풀로 만들어 낸 생명밥상' '5~7년이 지나야 수확할 정도로 귀한 채소인 산마늘 김치' 등 지역 자원을 활용해 도시민들과 소통하는 자리를 마련할 계획이다.

마을 농촌교육농장에서는 '당신의 밥상은 안녕하신가요?'라는 주제로 풀누리소반에 대한 교육이 진행되고 원주 상지대 한방병원과 함께 하는 생태치유여행, 산마늘 장아찌와 백설기 만들기 체험, 고택 음악회, 아름다운 숲길과 외씨버선길에서 '마음을 치유하는 여행, 숲에서 놀자', 돌탑쌓기와 보물찾기, 산채비빔밥과 발효음식 등 먹을거리 장터 운영 등 아기자기한 프로그램들이 준비돼 있다.

대티골 부자마을 만들기사업 조력자였던 영양군의회 김수영 전문위원은 "대티골 사람들이 추진하는 일들은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자연으로 몸과 마음의 생채기를 치유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옛날 수탈과 민족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옛 국도길도 마을 사람들에 의해 생명의 길로, 반성의 길로, 아름다운 길로, 생채기를 치유하는 길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영양·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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