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혼] 제2부-신라정신 (1)신라정신이 오늘에 끼친 것

역경을 기회로, 불가능을 결실로…신라인은 만들어냈다

박혁거세의 탄강 이야기가 서린 나정의 소나무 사이로 멀리 남산 자락의 소나무 숲에 가린 신라 최초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창림사지가 아득하게 보인다. 이채근기자
박혁거세의 탄강 이야기가 서린 나정의 소나무 사이로 멀리 남산 자락의 소나무 숲에 가린 신라 최초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창림사지가 아득하게 보인다. 이채근기자
왜적을 막기 위해 경주 감포 앞바다 바위틈에 수중무덤을 만들도록 한 문무대왕의 염원 덕분인지 신라는 1천년을 이어오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이채근기자
왜적을 막기 위해 경주 감포 앞바다 바위틈에 수중무덤을 만들도록 한 문무대왕의 염원 덕분인지 신라는 1천년을 이어오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이채근기자

◆들어가며

신라 천년 고도(古都) 경주의 4월은 찬란했다. 벚꽃은 봄 바람 타고 비가 되어 내렸고 주택가 기와는 봄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주말에는 꼬리 문 차량과 인파로 넘실거렸다. 마치 1천년 전, 서라벌 왕경(王京)의 끝없는 기와집, 이어지는 석탑들, 100만의 신라인들이 붐볐던 그때 만큼 활기찰까.

어떻게 한반도 동쪽 끝자락, 작고 궁벽했던 6촌장들의 땅 서라벌이 삼국을 통일하고 무려 1천년을 견뎌내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하는 '신라'로 세계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까. 천년 왕국 신라, 그리고 신라인들, 그들은 누구이고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놓았는가. 위기의 대구경북, 신라에게 갈 길을 물어봄이 어떠하랴.

◆'역류의 땅', 서라벌의 신라정신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신라는 망하고 없었지만 산하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천년 왕국, 서라벌은 '역류(逆流)의 땅'이었다. 서라벌도 강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 강은 한반도의 강과는 달랐다. 압록강, 낙동강, 한강처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지 않았다.

남쪽 울산 울주군에서 발원하여 경주를 흐르는 이 강은 남천(南川)과 만나 서천(西川)을 이루고 다시 북천(北川)과 합치고, 북으로 안강 들녘을 지나 포항을 거쳐 망망대해 동해로 빠져나가는 옛날 그 형산강(兄山江)이었다. 강은 오늘도 그때처럼 말없이 북으로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역류하듯 신라와 신라사람들은 달랐다. 역경을 기회로 삼았고, 불가능을 결실로 만들었다. 역발상에도 능했고, 나름의 생존법도 터득했다. 지리적으로 가장 외졌고, 문화적으로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으며, 땅도 가장 작았다. 하지만 신라와 신라사람들은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첫 통일왕국을 만드는 대 역전 드라마를 연출하며 천년 신화를 남겼다.

경북대 사학과 주보돈 교수는 "신라는 개방성과 진취성, 적극성, 문화의 복합성, 새로 편입되는 이주민들에 대한 수용력 등의 많은 장점을 가진 나라였고, 그러했기에 일통삼한의 역사를 일궈냈다"고 분석했다. 주 교수는 통일을 이루기까지 국가 인재양성 역할을 충실히 했던 화랑(花郞) 정신도 훌륭했다고 평했다.

30년 가까이 경주에서 활동하며 '계림을 밝히는 별들' 등 경주 관련 책을 펴내고 있는 채종한 위덕대 교수는 "옛 신라사람들은 어떤 난관도 잘 헤쳐나가는 역경 극복의 정신이 남달랐고 많은 장점들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면서 "경주를 아우르며 거꾸로 흐르는 강처럼 신라인들은 발상의 전환이 뛰어났다"고 말했다.

'역류의 땅' 서라벌에서 이뤄진 역발상, 신라다운 장점의 흔적들은 어떤 것들일까. 경북대 주보돈 교수, 위덕대 채종한 교수, 경주대 정병모 문화재학과 교수, 경주문화원 고복우 사무국장, 삼국유사 관련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던 권은태 ㈜마루 대표, 경북도'경주시 관계자 등을 만났고 경주를 훑었다. 서라벌에 뿌리내린 신라정신은 위기에 처한 오늘 우리들이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통일의 힘, 신라정신은?

우선 김유신, 사다함, 관창 등 통일의 밑거름이 된 숱한 인재를 배출했고, 통일의 원동력 역할을 한 화랑정신이 있었다. 임전무퇴(臨戰無退)와 충효 정신이 그것이었다. 모든 신라인들이 외우게 된 간단한 한마디, '나무아미타불'로 마음의 의지처를 얻고 신라인을 하나로 만든 불교 대중화의 선구자 원효(元曉) 스님의 흔적이 컸다.

원효 스님은 일심(一心'한마음), 화쟁(和諍' 다양한 주장의 화해), 무애(無碍'거침이 없음)로써 '첫 새벽'이란 이름처럼 신라를 하나로 묶는 길을 열었다. 갈라진 국토, 찢어진 민심, 사랑과 미움, 적과 우리 편의 대립을 넘어 통합하고 화합하는 정신을 일깨웠다. 그것은 '종교개혁'과 같았다.

개방성과 진취성, 적극성, 도전성은 신라의 또 다른 진수였다. 불가능과도 같은, 인도로의 첫 구법순례(求法巡禮)를 이룬 혜초(慧超) 스님. 그의 역작 순례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세계 3대여행서의 하나가 됐다. 골품제의 신분 제약을 넘어 새 항로 및 청해진 개척으로 해상왕이 된 장보고(張保皐)의 도전 정신도 있다. 영일만의 신화를 일궈낸 포항제철의 사나이들도 신라인의 후예로서 부끄러움이 없다.

외국문물에 대한 개방과 수용, 적응성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 이주민은 물론 인도와 페르시아 등 이주민들에 대한 흡수와 등용정책은 일찍부터 이 땅에 국제화'다문화의 싹을 틔웠다. 그것이 현재 200만 명의 해외 이주민들과 함께 어울려 살수 있도록 하는 바탕이 아니겠는가.

소통하고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군주의 전횡을 막고자 한 화백(和白)회의와 국내파'유학파 간 조화도 신라인의 장점이었다. 아울러 다양한 사상과 이념도 받아들여 신라의 것으로 만드는 현묘지도(玄妙之道) 즉 풍류(風流)도 있었다. 토속신앙에다 샤머니즘과 유교, 불교, 도교 등을 모두 버무린 풍류를 경주 출신의 학자 김정설(소설가 김동리 형)은 '멋'이라 불렀다. 풍류는 이념, 종교, 사상의 갈등을 줄였을 것이다. 화랑들은 현묘지도를 익혔고 일통삼한의 웅대한 뜻을 펼쳤다.

물론 귀족과 왕족 등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도 빠뜨릴수 없다. 진충보국(盡忠報國)을 당연한 미덕으로 여겼다. 이는 훗날 나라 위기 때마다 떨쳐 일어나는 영남인들의 의병 정신으로 이어지게 했다.

석굴암은 역발상의 극치였다. 인도 아잔타 석굴, 중국의 윈깡 석굴 등은 사암이거나 석회석이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신라의 돌은 화강암이었다. 신라인들은 거꾸로 단단한 화강암에 부처를 새겼다. 그리고 다시 돌로 덮어 인공석굴을 만들었다. 자연석굴보다 인공석굴은 더욱 과학적임이 증명됐다. 너무나 과학적이고 아름다웠기에 찬사도 모자라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어려운 한자로 신라 말을 표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이두문(吏讀文)도 창안했다. 보다 쉬운 불교 경전이 가능했고 향가와 역사가 기록될 수 있었다. 황룡사 9층탑 등 대형 건축 프로젝트에 다른 나라 석공'장인들까지 초청하는 적극성과 유연성도 뛰어났다. 새로운 성(城)을 쌓으면 책임자, 동원된 마을, 참여자의 이름까지 남기는 책임성 역시 '역류의 땅' 신라의 흔적이었다.

문인 조지훈은 "통일 신라의 문화는 해양성적인 명상성(暝想性)과 대륙성적인 웅혼성(雄渾性)을 조화하여 우리 문화의 조화기를 시현하였으니 화랑도와 석굴암같은 것이 그 실례"라 평했다. 그는 또 "신라가 삼국 중 가장 늦게 발달했지만 대륙문화를 충분히 소화하여 자기를 세울 수 있는 여유가 있었기에 통일의 힘을 마련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특히 그는 석굴암과 관련, "불상 표정은 최고 신품(神品)일 것이요, 동양미술사상 동시대의 최고 정점이라 함은 전 세계의 감식안을 가진 자의 일치된 견해"라며 "불상의 모델은 신라인이다. 인도'중국'일본의 어떤 불상보다도 특이하고 원만한 그 풍모는 지금 경상도 남녀의 얼굴과 같다. 그리스조상(彫像)의 타입이 지금도 다도해 근방에 남은 것처럼'''"이라며 신라인들의 역발상 작품인 석굴암의 우수성을 극찬했다.

◆통일 신라가 우리에게 남긴 명암은?

신라는 대구경북지역에 엄청난 문화유산을 남겼다. 국보와 보물을 비롯, 전국 문화재의 20%로 16개 시'도 중 가장 많다. 모든 것이 서라벌로 몰렸고 인재가 넘쳤으며, 한때 왕경의 인구가 중국 당(唐)나라 수도 장안의 100만 명에 육박했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에 훗날 1425년, 조선 경상도관찰사 하연은 경상도지리지 서문에서 "영남에서 발생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정통 왕조로서의 정치적 문화적 유산을 후세에 전해주자 후대인들은 영남이 다른 지방에 비해 훌륭한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우수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한 인물을 배출했다"고 했다.

또 지리지는 "경상도 내 풍속이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좋아하며 명문거족이 조정에 가득 차 있다"고 했고 관리 박문수(朴文秀)는 "영남은 역대 왕조의 인재부고(府庫)로서 금일의 조정관료나 여항(閭巷)의 민서(民庶)에 이르기까지 영남에 그들의 시조를 둔 자가 무려 70~80%가 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중환(李重煥)은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다"(朝鮮人材 半在嶺南)고 할 만큼 인재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사학자 신채호, 함석헌을 비롯한 진보적인 사학자들은 신라의 통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신채호는 신라가 당이라는 중국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국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비판했다. 함석헌 역시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광활한 만주벌판을 달리던 고구려가 몰락하고 외세와 결탁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기에 우리의 역사는 이렇게 보잘것 없이 찌그러들었다"고 했다.

철학자 김용옥은 "사실 인류사를 전관하여 보건대 통일이 반드시 좋은 것이고 분열이 나쁜 것이라는 가치 판단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분열이 되어 있음으로써 얻는 이득도 만만치 않는 것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삼국 통일은, 독일 통일이 경제력에 밑받침한 흡수통일이었다면, 군사력을 동원한 무력통일이었음은 분명한 일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춘추의 무력통일이라는 테제는 결국 후삼국의 분열이라는 결론으로 발전하여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후삼국의 분열이라는 역사적 사태는 김춘추의 무력 통일이 주체적이었든 비주체적이었든을 불문하고 부족국가 시대로부터 제각기 다른 체험을 가지고 각기 다른 아이덴티티를 형성해 온 삼국문명의 융합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김춘추의 무력 통일이 후삼국으로 다시 분열된 사태를 관망할 때, 오늘 우리에게 현실적 통일의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재분열의 악화된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삼국통일과 한국통일'이란 책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경북대 주보돈 교수는 통일에 외세를 끌여들였다는 비판에 대해 "당시 삼국은 어느 쪽도 서로 동족국가라 여기지 않았다"면서 "사실 한민족은 처음부터 만들어진 상태로 출발한 것이 아니며 당시에는 아직 형성과정에 있었을 따름이었다. 서로 비슷하다는 동류의식을 가졌으나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대립'격돌해야 하는 적대세력이었으므로 외세 시각은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

정인열 기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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