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수제화 거리는 처음 교동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번성하였고, 1980년대 중반 술집 '초원의 집' 화재로 인해 상권이 붕괴되면서 집세가 싼 향촌동과 대안동으로 이동하였다. 향촌동과 대안동 수제화 거리는 70, 80년대 중반에 가장 큰 호황을 누렸다. 1977년 중학교 때 삼촌을 따라 수제화 기술자로 들어선 '오리지날 모다필 제화' 우종필 대표는 이제 70세가 넘은 그 삼촌과 함께 화려했던 수제화 시대를 풍미했던 산 증인이기도 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70년 중'후반 갑피사 월급은 15만원 정도로 일주일 수입이 공무원 한 달 월급에 버금갔다고 하니 그 시대 수제화 기술자들의 인기와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 웬만한 월급쟁이 월급의 두세 배 가격을 호가하던 사치품이라 일컬어지던 수제 구두는 연예인들과 고급 관료들을 통해 팔렸고, 80년대 중반 레디메이드 구두들이 등장하면서 사업이 쇠락하기 시작한다. 지금은 향촌동과 대안동에 60~70여 개의 점포가 남아 한국에서는 서울의 성수동 구두 골목과 함께 한국 수제화의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1~2㎜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교한 작업과 까다로운 공정의 수제화는 발이 편하고 개인의 특별한 개성을 맞춘 장점으로 마니아들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 있는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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