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비를 위한 발라드 '서대회'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등 따시고 배부른 것'

날씨를 탓하지 않아야 한다. 산행을 하든 놀러를 가든 날씨는 하늘에 맡겨야지 원망해서 될 물건은 아니다. 옛날에는 '우천순연'이란 말이 통했지만 요즘은 통하지 않는다. 교통편과 숙소, 그리고 식당까지 예약제이기 때문에 비오고 바람 분다고 계획을 취소할 수는 없다.

출발 열흘 전에 낙안민속휴양림(061-754-4400)을 예약하고 길을 나섰다. '남부지역은 비'라는 예보가 약간은 께름칙했지만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소간 행사에는 반드시 오두방정을 떠는 망나니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번 여행에도 촉새 같은 친구가 끼어들어 달리는 차 안에서 날씨타령을 하며 계속 훼방만 놓고 있었다.

"비 오는 날 경주 불국사나 화순 운주사의 우중 운치가 얼마나 좋은지 너희들은 잘 모르지. 오늘 우산을 들고 선암사 편백나무 숲길을 한번 걸어보면 우리가 진작 몰랐던 산사의 정취를 느낄 수 있을 거야." 불평분자를 다독거리는 말을 계속 지껄였지만 호남고속도로로 진입하자 빗방울은 더 굵어졌다.

별로 마음 내켜 하지 않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어렵게 출발한 여행이었다. 친구들은 앉아서 맛있는 음식 먹을 생각만 했지 궂은 날씨와의 전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여행 마니아들끼리 팀을 이뤘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기본이 없는 초심자들은 불평불만부터 먼저 쏟아놓는 법이다.

빗길 네 시간을 달려 선암사 입구에 도착하니 "용용 죽겠지" 하는 투로 빗발은 더 강해졌다. 주차장에서 절까지 1㎞를 걸어가자고 우길 처지가 아니었다. 계곡에 내려서서 승선교 아치 사이로 비에 젖은 강선루를 쳐다보는 그 멋진 풍경을 놓치는 것이 아까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생애 중에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텐데." 낙안읍성 앞에 이르렀지만 빗줄기는 여전했다.

눈의 호사를 위해 여행을 떠났지만 눈은 정작 풍경을 보지 못하니 안타깝다. 이럴 땐 입의 만족이란 차선책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수밖에 없다. 벌교시장 뒷골목에 있는 영광식당에서 서대무침회 한 접시와 생선찌개를 시켰더니 그동안 하늘을 향해 퍼붓던 '비의 투정'이 '비를 위한 발라드'로 바뀌어 소주잔 부딪치는 소리 속에 웃음이 묻어났다.

요즘 푸줏간에서는 고기를 부위 별로 팔듯 사람의 행복도 부위 별 느낌이 다른 법이다. 눈과 귀가 느끼는 느낌도 서로 달라 빛과 소리의 장르로 갈라진다. 그래서 눈은 미술을, 귀는 음악을 담당한다. 입과 코도 상황 별로 임무를 다르게 떠맡는다. 통상적인 업무는 밥 먹고 그냥 냄새를 맡는 것이다. 그러나 수컷이 암컷을 만나는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입과 코가 서로 협조하여 물고 빨고 체취를 맡아 오감을 만족시키는 일에 복속되기도 한다.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등 따시고 배부른 것'이다. 병상에 누워 있는 간암 말기 환자의 배부른 모양을 보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위장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극에 달했을 때 하는 말이다. 행복을 느끼고 있는 시간대에 약간의 불행이 감지되어도 배불러 둔해진 육체는 그걸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시장에서 낙지 몇 마리 챙겨 넣고 숙소인 휴양림으로 올라갔다. 비는 계속 내렸지만 배 속에는 따사로운 햇볕이 드는지 아무도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유리창 너머 산 빛은 흐릿한데 천상병의 '비 오는 날'이란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오십 원을 훔쳐 아침 해장으로 나간다./ 막걸리 한 잔 내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냐?/ 가방 들고 지나는 학생들이/ 그렇게도 싱싱하게 보이고/ 나의 늙음은 그저 노인 같다./ 비오는 아침의 이 신선감을/ 나는 어이 표현하리오?/ 그저 사는 대로 살다가/ 깨끗이 눈감으리오."

그저 사는 대로 살다가, 그저 사는 대로 살다가. 그렇고 말고.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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