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밟힌다'는 말은 참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 표현 속에는 여백이 보이고 감칠맛이 난다. 발에 밟히는 모든 물건은 문드러지거나 흠집이 나면서 상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눈에 밟히는 것은 '갖고 싶다' '보고 싶다'는 뜻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지극한 애틋함이 서려 있다.
눈에 밟히는 것들은 한 번쯤 봤거나 만났던 기억을 갖고 있지만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 것들이다. 그것은 한 번 다녀온 곳에 다시 가고 싶다거나 흥정하다 만 물건을 다시 사러 갔을 때 이미 팔리고 없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눈에 선한 것은 그리움이 빚어내는 하나의 현상이지만 그것보다 강도가 더 높은 것이 눈에 밟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예외다. 유행가의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가사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보면 볼수록 보고 싶을 뿐 자주 봤다고 물리는 법이 없다. 눈을 떠도 눈에 밟히고 눈을 감아도 선하게 다가온다. 이은상 작사 현제명 작곡의 '그 집 앞'이란 가곡을 들어보면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던 옛 생각이 문득 떠올라 새삼 눈에 밟히는 그 소녀가 못내 보고 싶어진다.
선유도에 다녀오고 나서 그 섬이 자꾸만 눈에 밟혀 애를 먹었다. 2박 3일을 머물렀지만 겉껍데기만 핥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해 여름, 선유도행을 결심하고 팀을 새로 구성했다. 젊은 시절부터 산과 바다를 함께 다녔던 산꾼과 스쿠버다이버들이 여덟 명이나 모였다.
이번에는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열도의 여러 섬들을 훑어볼 요량으로 낚싯배를 가지고 있는 민박집을 잡았다. 그 집은 선착장에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 언덕바지에 있었지만 탁 트인 바다 경치가 그만인데다 주인 내외의 마음씨가 좋아 어디든 데려 달라하면 군소리하지 않고 앞장서 걸었다.
선장인 주인 아저씨는 마누라 흉보는 것이 장기였다. 이유인즉 장가올 때 자신은 불알 두 쪽밖에 가진 게 없어 부잣집 막내딸인 얼굴이 살짝 얽은 아가씨를 각시로 맞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돈의 힘을 앞세운 마누라의 구박이 심해 참고 사느니 실컷 두들겨 패주고 육지로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누라 잔소리가 듣기 싫어 낚싯대 하나 둘러메고 바다로 나가는 게 일과라고 했다. 첫날은 독립문 바위를 지나 관리도 부근으로 들어가 바위 벼랑에 붙어 있는 홍합을 한 망태기 넘게 따왔다. 암벽 전문가 세 사람이 바위에 달라붙어 채취해온 담치는 어른 주먹만 한 것들로 껍질도 얼마나 두꺼운지 화덕에 구워 먹어보니 맛이 기가 막혔다.
다음 날 아침, 선장은 "오늘은 바다에 나가 아까다이(참돔)나 한 마리 건져오면 안줏거리는 충분하겠제"라고 중얼거리며 시동을 걸었다. 선장의 배가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돔 낚싯배에 접근하니 "소주 있음 한 병 주소" 하고 낚시꾼들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
선장은 얼른 싣고 온 소주와 음료수를 건네주고 선유도에 놀러 와서 생선회 맛을 못 본 우리의 처지를 설명하고 "잡은 고기 중에서 잔챙이 한 마리만 팔아라"고 애원한다. 그들이 물 칸에서 끄집어 낸 잔챙이란 돔 새끼는 등지느러미에 5.4㎏이란 패찰을 붙이고 있었다. "이거 서울 가면 30만원은 쉽게 받는데 4만5천원만 주소." 횡재는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린 횡재의 기쁨을 술로 자축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내가 돔을 끌어안고 배에서 내리는데 대가리와 꼬리가 뒤에서도 훤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하니 선유도 잔챙이 고기의 크기를 대충 짐작은 하시겠지. 구박 전문 마나님도 이날은 "오늘은 일 같은 일 좀 했네"라고 남편을 격려해 주었다. 오호라, 구박의 원인이 여태 '일 같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데 있었구나. 아뿔싸.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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