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나이 먹은 소년

화가 장욱진(張旭鎭'1917~1990)은 "나이는 먹는 것이 아니라 뱉어 내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면서 본래의 천진함을 잃어 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그는 오히려 세월을 더할수록 순수에 가까워져야 함을 "먹는 것이 아니라 뱉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주름과 함께 생겨나는 아름다움이 있다면 가진 것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여백일 것입니다. 텅 비어 가는 허전함이 아니라 비어 있는 것이 곧 충만임을 아는 것이며 빈자리와 채워진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삶을 걸으며 깨우쳐 가는 것입니다. 청년기의 의욕과 활력을 지나 장년의 원숙함과 노련함이 지혜의 근본을 이루고 노년이 되었을 때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맑음을 되짚어가는 것, 그것은 회한이나 뒷걸음이 아닌 본래의 나를 찾는 성찰이며 고백입니다. "순수함을 잃었다"거나 "맑던 마음은 어디 가고 때 묻은 마음만 남았다"거나 하는 것은 돌아갈 수 있다면, 찾을 수 있다면 잃은 그 무엇을 찾고 싶다는 아쉬움입니다.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맺는 말은 "그때는 행복했는데…" 라는 회운입니다. 맑음을 간직한 푸른 눈으로 세상을 보던 시절, 행복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그것이 그 시절의 순수를 그리워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경주에는 신라문화원에서 운영하는 '추억의 수학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제는 장년이 된 사람들이 지난날의 경주 수학여행을 추억하면서 교복을 입고 경주를 관광하는 것입니다. 반백의 장년들이 교복을 입고 30, 40년 전으로 돌아가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아주 좋아 보입니다. 점잖게 체면을 차려도 교복을 입으면 개구쟁이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분의 말을 들어보면 남자는 교복을 입혀놓으면 단추를 풀어헤치고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건들거리는데 여자들은 오히려 더욱 얌전하고 조신하게 행동한다고 하면서 교복을 입혀놓으면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확연해진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래전 수학여행을 왔던 경주에서 사진을 찍었던 그 자리에서 수십 년이 흐른 후 다시 그 친구들과 같은 배경에 섰을 때 그분들의 느낌을 어떨까. 사진은 표정만 담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감정과 느낌을 함께 담는다는 말을 실감하게 합니다.

불국사는 '추억의 수행여행' 필수 코스여서 경내에서 자주 보게 되는데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곳곳을 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삼삼오오 어울리면서 큰소리로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기도 합니다. 어린 학생들 같습니다. 이렇듯 그분들을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현재 위치에서 지금의 나이에 그들을 즐겁고 설레게 하는 것은 아마도 진급, 명예, 돈 등이 아닐까. 평상시에는 유치한 농담에 큰 웃음을 터트리거나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맨바닥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지 않을 것입니다. 웬만한 자극에는 웃음도 감동도 느끼지 못하는 나이가 되었고 그러한 것에 마음을 주기에는 삶의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 빠르게 오래전에 떠나와서 기억조차 희미한 일들이 구체적인 장면으로 다시 살아올 때 공통의 테마가 순수와 청춘이었음이 기억날 때 그것이 감동이고 설렘일 것입니다.

잃어버리는 것도 있지만 얻는 것도 있습니다. 떠남을 슬퍼하지만 맞이하는 기쁨도 있습니다. 부질없는 생각과 한숨들을 나이와 함께 하나씩 뱉어가는 연습을 한다면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음이 두렵고 힘든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화가 장욱진을 일컬어 세상 사람들은 '나이 먹은 소년'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의 그림은 너무도 맑고 단순해서 머릿속으로 살피지 않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그대로 풍경이 되는 나무이고 아이들이고 소, 집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단순해질 수 있다는 것 복잡하지 않고 꾸미지 않고 소박한 채로 남을 수 있는 것은 모으고 쌓아두는 삶이 아니라 덜어내고 비우는 삶이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늙고 병드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소년의 마음은 시간과 세월의 간섭을 받지 않고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순수를 잃어버림을 세월에 전가하지 말고 감동의 인색함을 시간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소년이 되어가는 삶을 생각해 봅니다.

성타(불국사 주지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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