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구야구를 꽃피운 '아버지' 같은 분이었습니다."
권영호 영남대 감독은 서영무 삼성 라이온즈 원년 감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엄격하면서도 정(情)이 넘쳤고, 애제자들의 성장에 웃음 짓던 모습은 대구야구계의 '대부' 그 자체였다.
그래서일까. 프로에 참가키로 한 각 구단이 초대 감독 내정을 고민할 때 대구를 연고지로 한 삼성은 예외가 될 수 있었다. '서영무'라는 확실한 보증수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은 1981년 중앙대에서 지휘봉을 쥐고 있던 서 감독에게 '사자군단'을 이끌 의향을 제일 먼저 물었다. 서 감독도 선뜻 'OK' 사인을 줬다. 라이온즈 1대 감독은 별다른 흥밋거리를 주지 못한 채 결정됐다.
대구상고를 졸업한 서 감독은 선수 시절 시선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1960년대 초 모교인 대구상고 감독에 부임하며 서서히 존재감을 알렸다. 1964년 경북대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대구상고를 다섯 번이나 정상에 올려놓은 서 감독은 일본에 야구연수를 다녀온 뒤인 1967년 경북고 감독에 부임하면서부터 '우승제조기'라는 별칭을 달고 다녔다.
그해 임신근'조창수'양창의'강문길 등을 주축으로 청룡기를 제패했고, 1970년에는 주전 중 한 명의 3학년을 제외하고는 2학년으로 꾸려진 선수들을 이끌고 대통령배를 들어 올렸다. 이듬해인 1971년은 그를 신화의 반열에 올려놨다. 남우식'황규봉'천보성'정현발'배대웅 등이 주축이 된 경북고는 그해 대통령배를 포함해 봉황대기, 청룡기, 황금사자기, 화랑대기 등 전국대회의 우승기를 모조리 품었다. 고교에서는 상대팀이 없어 실업팀과 연습경기를 가질 정도로 경북고의 위세는 대단했다.
선수 개개인의 능력이 출중했지만 서 감독의 엄격한 훈련이 최강의 작품을 빚어냈다. 그해 1학년이었던 이선희 삼성 스카우트 코치는 "그때는 키도 작고 발도 느렸다. 당시 야구부원이 30명 정도 됐는데 달리기를 해 15등 안에 들지 못하면 경기에 나가지 못했다. 밤늦도록 달리기 연습을 했다. 운동장에 야구부원들의 땀이 고일 만큼 연습이 계속됐다. 경기가 있는 날이 쉬는 날 같았다"고 했다. 선수를 보는 눈도 남달랐다. 1번 타자였던 이선희는 연습 때 배팅 볼을 던졌다. 가끔 주전투수 황규봉의 뒤를 받쳐 중간 계투요원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서 감독은 3학년 때 그를 투수로 전향, 새로운 야구에 눈을 뜨게 했다.
1975년 한양대로 자리를 옮긴 서 감독은 2년 동안 5차례 우승을 일궈냈고, 서울고에 둥지를 튼 이듬해(1978년) 개교 이래 처음으로 봉황대기를 품에 안기며 16년간 감독생활 중 50번째 우승을 손에 넣었다.
고교 때나 프로에서 그가 철저하게 책임과 품위를 강조했다. 고교 때는 따로 시간을 내 선수들에게 시상식 도열훈련을 시켰고 프로에서도 개막식 입장식 연습을 수차례나 되풀이했다. 어긋난 행동을 할 땐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시 매니저였던 김종만 대구시야구협회장은 "1982년 후기리그 10여 경기를 앞두고 서울 원정 때 선수 3명이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우승이냐 준우승이냐를 다투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서 감독은 그들을 불러 호통치고서 대구로 내려 보냈다. 선수층이 얇은 그때 주전 3명이 빠지는 바람에 포수 손상득이 외야를 봐야 했다. 서 감독은 경기결과보다는 선수의 자질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고 했다.
맹장 서영무에게도 통하지 않는 세상이 프로였다. 경북고 출신의 임신근과 대구상고 출신의 우용득을 코치로 둔 서 감독은 국가대표로 성장한 제자들을 불러 고교야구의 화려함을 프로에서도 이으려 했다. 경북고 출신 황규봉'이선희, 대건고 출신 권영호 등 3명의 투수가 15승씩을 거뒀지만 삼성은 박철순(24승)이 버틴 OB베어스를 넘지 못해 원년 한국시리즈 트로피를 내주고 말았다.
프로의 세계는 냉혹했다. 원년우승 실패는 서 감독에게 경북고 신화를 선물했던 애제자 임신근 코치를 떼어냈다. 대신 재일교포 출신인 김호중 투수코치와 선진야구를 익힌 이충남 조감독이 그의 옆을 지켰다. 김종만 대구시야구협회장은 "2년 선후배 사이였던 김호중 코치와 이충남 조감독의 갈등이 선수단을 뒤흔들었고 그 여파가 서 감독에게까지 미쳤다"고 했다.
분란이 계속됐다. 김호중 코치는 1983년 4월 구단으로부터 코치 해임 통고를 받았다. 서 감독도 개막 한 달 만에 지휘권을 내놓고 말았다. 5월 18일 서 감독은 1만2천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일 축하연을 하고 일주일 지나 총감독으로 임명돼 그라운드를 떠났다.
1983년 시즌이 끝난 뒤 그는 대구를 떠났고 1984년 2월 OB 베어스의 관리이사로 자리를 옮겨 새 삶을 시작하는 듯했다. 그러나 서 감독에게 불행은 예고 없이 또 찾아왔다. 5월 11일 오후 6시 10분쯤 서영무 감독은 OB선수단이 묵은 대구 수성관광호텔에서 쓰러져 병상에 누운 지 3년 만인 1987년 5월 26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능변가였고 그림에 조예가 깊었으며 바둑, 낚시를 즐겼던 서 감독이었다. 삼성 감독 시절 시합에서 이기면 기분이 좋아 선수들을 불러놓고 스스럼없이 노래 한 자락을 읊조렸던 그는 야구장에서 울리는 함성을 더는 듣지 못했다. 향년 53세였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